[밀물썰물] 설캉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 없는 첫 설이 다가왔다. 지난해 말 각국이 코로나 봉쇄 조치를 완화하면서 공항을 열고 해외 입국을 허용하기 시작하고, 정부도 설 직후 실내 마스크 해제를 검토하면서 오랜만에 설다운 설을 맞게 됐다. 지난해 설을 앞두고 국무총리가 “안전과 건강을 위해 고향 방문을 자제해 달라”고 대국민 담화를 통해 수차례 부탁했던 것과는 딴판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는 온 가족이 다 함께 부모님이 계신 고향에 모여 ‘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에 놓는 홍동백서(紅東白西) 차례상을 차리고, 성묘하러 가는 풍경이 일상적이었다. 하지만 지난 3년간 코로나 변이 바이러스가 확산하면서 가족 전체가 모이지 않고 각자 소규모로 명절을 보내던 풍습이 엔데믹에도 오히려 자리를 잡고 있다. 게다가, 설 연휴를 휴식과 재충전의 기회로 삼으려는 사람들이 늘면서 민족 대이동과 고향 찾기라는 설 풍속도를 바꿔 놓고 있다. 이런 새로운 설 풍속을 빗대 ‘설캉스(설+바캉스)’란 신조어까지 생겨날 정도다. 실제로 이번 설 연휴 기간에 기획 여행 상품 예약이 전년 설 연휴보다 4배 이상 증가했다는 보도도 이어지고 있다.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와 일본에 해외 여행이 집중되고 있고, 해운대와 제주도 등 국내 호텔에서도 설캉스를 즐기려는 관광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2000년간 이어진 관성으로 설이면 가족과 친척부터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제는 집에서 강정까지 직접 만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정구지전을 얇게 펴서 노릿하게 굽는 어머니의 손맛은 영원히 간직하고 싶다. 그 음식은 차례상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온 식구들이 모여 앉아 함께 행복했던 시간을 확인하는 타임머신이기 때문이다.
이해인 수녀는 시 ‘설날 아침’에서 “일 년 내내 꼬까옷 입고 살 줄 알았던/ 어린 시절 그 집으로 다시 가고 싶네요/ 식구들 모두 패랭이꽃처럼 환히 웃던/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가고 싶네요”라고 설날 풍경을 되새겼다. 갈수록 개인화되면서 가족이 함께할 시간이 줄고 있지만, 탕국에 생선, 나물 반찬으로 함께 먹고, 어른들께 세배하고 덕담을 나누는 설 풍경이 여전히 그립다. 세상이 변하더라도 사랑하는 가족과 시간을 함께하면서, 먼저 간 가족을 추억하는 설의 풍습과 정신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번 설에는 우리 모두 가족과 함께 행복하기를 기원한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