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은의 문화 캔버스] 예술이 지닌 신비와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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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대 민석교양대학 교수·미술평론가

예술의 위대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재능과 훈련, 혹은 영감과 기술의 두 바퀴
노력이 재능을 이길 수 없는 것 같아도
특별한 영감은 결국 부단한 연습에서 발현

지난주 동생 집을 방문했다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조카를 보았다. 베토벤 소나타 선율에 취해 눈을 감고 그럴듯하게 몸을 움직여 가며 능숙하게 피아노를 치는 중학생에게 감탄해 칭찬을 해 주려던 순간, 동생은 “또 악보를 보지 않고 외워서 치고 있다”며 조카에게 핀잔을 주었다. 악보를 보고 쳐야 하는데 자꾸 듣고 외워서 치려고만 해서 걱정이라는 것이다. 동생은 조카가 1년 동안 피아노를 배워 제법 치게 되었을 때 악보를 전혀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고 했다. 조카는 청음 능력이 매우 뛰어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억지로 악보 읽는 훈련을 하다 오히려 더 귀한 청음 능력을 개발하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스러웠다. 물론 음악 공부에서 악보 읽는 것도 필요한 훈련이지만 조카가 가진 청음 능력은 더 귀한 능력이니 그것도 함께 발전시키면 좋겠다고 동생에게 조언해 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대학 동아리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뛰어난 청음 실력을 갖춘 친구를 보고서 경탄과 동시에 심각한 좌절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나는 대학 밴드 동아리에서 건반 악기인 신시사이저 연주를 맡았다. 7살 때부터 10년 동안이나 피아노를 배웠던 나는 가요, 팝송, 록 음악 정도야 쉽게 연주할 수 있을 걸로 생각했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합주 첫날 나는 어느 곡도 연주할 수 없었다. 악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타나 베이스, 드럼을 맡은 어느 누구도 악보를 보지 않았고 돌발적인 즉흥 연주를 즐겼다. 그들은 악보가 없어서 연주할 수 없다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엔 팝송이나 록 음악의 완전한 악보를 구하기가 어려워 공연 준비하는 내내 나는 무척 애를 먹었다. 그러던 중 대학 응원전 행사에 우리 동아리가 반주를 맡게 되었다. 나는 드디어 그간의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할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응원가 대부분은 잘 알려진 가요였기 때문에 미리 악보를 구해 열심히 연습한다면 피아노 실력을 보여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내가 깨달은 것은 연습은 재능을 이길 수 없다는 뼈아픈 현실이었다.

응원가 연주는 건반 악기가 중요하기 때문에 기타를 맡은 팀원이 함께 건반 악기를 연주하게 되었는데, 나는 그의 연주를 듣고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나는 단순한 멜로디와 그에 맞춰 일반적 화음을 넣는 방식의 매우 초보적 연주를 했지만, 그 친구는 그 노래가 방송에서 흘러나올 때와 완벽하게 똑같은 전주, 간주, 반주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친구에게 악보를 좀 달라고 했더니, 자신은 악보를 볼 줄 모르고 그냥 들은 대로 연주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한 번에 8개 건반을 함께 눌러야 나는 소리를 악보 없이 들은 것만으로 정확하게 짚어 낼 수가 있다니? 늘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훈련만 해 온 나로서는 무척 당황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는 피아노를 배운 적도 없고 그 곡들을 특별히 연습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졸업 후 회사원이 되었지만 본인이 작곡하고 연주한 음반들을 꾸준히 발표했다.

이렇게 예술에 있어서 교육하거나 규칙화하여 설명하기 어려운 그것은 무엇일까? 모든 예술은 재능과 훈련, 영감과 기술이라는, 어찌 보면 아주 상반된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중요하게 관련된 두 측면으로부터 나온다. ‘기술’은 합리적인 규칙 등으로 설명될 수 있고 시간과 노력에 의해 숙련될 수 있는 부분이며, 다른 한편 ‘영감’은 설명이나 교육이 불가능한 초자연적이고 비합리적인 부분으로서 예술적 착상이나 충동과 관련된다. 영감은 본래 ‘고대 그리스의 시인이 뮤즈 여신에게 사로잡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시를 읊조리는 상태’로부터 유래했다. 비합리적인 광기 등에 사로잡혀 보통 사람들은 보거나 들을 수 없는 것을 보고 듣게 되는 일종의 접신 상태를 말한다.

기술은 열심히 연습하고 노력하여 얻을 수도 있다지만, 영감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변은 너무나 많아서 사실은 답변이라고 이야기할 수조차 없다. 남들이 가지지 않은 자기만의 개성을 표현함으로써, 천부적인 재능을 통해서, 특별한 경험과 시도를 통해서, 지식과 정보들을 습득함으로써, 그리고 또한 부단한 기술적인 연마에 의해 어느 순간 특별한 영감을 얻게 되기도 한다.

예술이 지닌 신비와 비밀은 바로 여기 있는 것이 아닐까. 예술가들이 평생 풀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예술의 그러한 측면이 아닌가 한다. 더 궁금한 분들에게는 영화 ‘블랙 스완’(2011)을 권한다. 부단한 훈련과 자기 관리로 기술에서는 누구보다 뛰어나지만, 평범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던 영화의 여주인공이 특별한 그 어떤 것을 찾아가는 과정을 함께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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