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묻은 시신 다시 꺼내 손도장… 항소심선 무기징역→30년 [사건의 재구성]
작년 4월 주식 공동투자자 암매장
1억 원 상환 요구에 계획적 살해
엄지 찍어 계약서 위조, 범행 숨겨
고법 “수법 잔인·포악 정도 아냐
죄질 불량하나 재범 위험 안 커”
야심한 밤을 틈타 40대 여성 A 씨는 경남 양산의 한 밭을 찾아갔다. 구덩이에서 홀로 흙을 파낸 A 씨는 땅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미리 준비해뒀던 인주를 묻혀 종이에 찍은 후 다시 흙으로 덮었다.
A 씨가 꺼낸 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주식을 투자하던 50대 남성 B 씨의 왼손이었다. ‘완전 범죄’를 꿈꿨던 A 씨는 직접 목 졸라 살해한 B 씨의 시신을 범행 이튿날 밤 다시 꺼내 왼손 엄지 손가락으로 주식계약서에 지장을 찍었다. 행방불명된 B 씨를 수소문하던 B 씨 지인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의사였던 B 씨는 A 씨와 인터넷 주식 카페에서 동업 투자를 위해 만났다. A 씨는 B 씨의 투자금 중 1억 원 상당을 임의로 사용했고, B 씨는 이에 대한 상환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A 씨는 상환 요구가 심해질 경우 자신의 가정이 파탄 날 것을 우려해 B 씨를 없애야겠다고 마음먹었다.
A 씨는 범행에 앞서 양산의 한 경작지 소유주에게 연락해 나무를 심어보고 싶다고 부탁하고 허가를 얻었다. B 씨를 묻어 없애기 위한 장소를 물색한 것이다.
지난해 4월 3일에는 포크레인 기사를 불러 나무를 심기 위한 구덩이를 파달라고 했다. 범행 전날엔 경찰 수사를 피하기 위해 가짜 차량번호가 적힌 A4 용지 100여 장을 무더기로 인쇄해 차량 번호판 위에 테이프로 붙였다.
지난해 4월 6일 부산의 한 사찰 주차장에서 B 씨와 만난 A 씨는 “매달 100만~150만 원 정도를 줄 테니 집에 찾아오지 마라”고 했다. 하지만 B 씨가 화를 내며 이를 거절하자 미리 준비해놓은 범행도구를 이용해 조수석에 앉아있던 B 씨의 목을 졸라 살해했다. A 씨는 계획대로 차를 몰고 미리 파놓은 구덩이로 이동한 뒤 B 씨의 시신을 은닉하고 다시 흙을 덮었다.
수사당국은 여성인 A 씨 혼자 살인과 시신 유기, 은폐 등을 하기 힘들었을 것으로 보고 조력자를 찾는 데 수사력을 집중했으나, 공범을 특정할 만한 증거가 나오지 않아 A 씨만 재판에 넘겼다. 법정에 선 A 씨는 “평생 뉘우치며 살겠다. 죄송하다”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1심에서 검찰은 A 씨에게 징역 28년을 구형했다. 그러나 1심을 맡은 부산지법 형사5부(부장판사 박무영)는 지난해 10월 살인, 사체은닉 등의 혐의로 기소된 A 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법원이 검찰의 구형보다 높은 형량을 선고한 것은 이례적이다. 1심 재판부는 “범행 도구를 사전에 준비하고, 시신 유기 장소를 미리 섭외했을 뿐만 아니라 시신을 옮길 자동차의 번호판을 다른 번호로 변경하는 등 치밀하게 범행을 준비하고 시신의 지문을 이용해 사문서 위조 범행까지 했다”고 설명했다.
A 씨는 1심 양형이 너무 커 부당하다며 항소했다. 이에 부산고법 형사1부(부장판사 박종훈)는 9일 A 씨의 항소를 받아들여 원심의 무기징역을 파기하고 대신 징역 30년을 선고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죄질이 극히 불량하고 유족의 정신적 고통과 상처는 형언하기 어렵다. 유족이 엄벌을 탄원하고 있고 피고인을 장기간 사회에서 격리하는 처벌은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범행 동기가 불량하고 계획적이기는 하나 수법이 잔인·포악한 정도에 이른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자신의 범행을 반성하고 있고, 동종 범죄 전력이 없어 재범 위험성이 크지 않다. 사회에서 영구히 격리하는 무기징역형을 선고할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한다”며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안준영 기자 jyou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