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 리포트] 유엔·인권단체 “한국, 강간죄 법 바꿔야”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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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RW, 법조계 부당 현실 지적
폭행·협박이 죄성립 필수 요건
권력 악용한 성범죄 대응 한계
“동의 여부를 형법에 포함해야”

이기순 여성가족부 차관이 지난달 26일 오전 양성 평등정책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기순 여성가족부 차관이 지난달 26일 오전 양성 평등정책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6일 여성가족부가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을 발표하면서 ‘비동의 간음죄(강간죄)’를 검토하겠다고 밝혔으나 6시간 만에 법무부가 “검토 계획 없다”며 반박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상대방의 동의 없는 성관계를 강간죄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 그간 한국 사회에서 지속적인 논란이 됐다. 최근 한 국제인권단체는 상대방 동의 여부를 강간의 핵심으로 인정하는 국제사회의 흐름을 언급하면서 한국 정부의 강간죄 개정을 촉구하는 글을 게재했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트워치(HRW)는 지난 2일 ‘한국, 강간죄 개정 계획 취소’라는 글을 게재하고 최근 비동의 강간죄 법률 개정을 둘러싼 한국 정부 부처간 잡음을 지적했다. HRW는 또 성폭행을 관대하게 처벌하고 있는 한국 법조계의 현실을 꼬집었다.

한국 형법 제297조는 강간을 ‘폭행 또는 협박’에 의한 성관계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재판부가 이에 더해 피해자가 저항할 수 없는 상태였는지까지 살펴보는 등 강간죄를 지나치게 협소하게 해석한다는 지적이 법조계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판사들은 가해자의 형량을 선고할 때도 전과가 있는지, 범죄를 저지를 당시 ‘심신미약’ 상태였는지 등을 감형 사유로 고려한다. 전국의 66개 성폭력상담소가 2019년 1월부터 3월까지 접수한 사례를 보면 폭행·협박이 없었던 성폭력은 71.4%에 이른다. 피해자가 성폭력을 당하는 곳이 직장이나 가정 등 친밀한 관계가 형성된 장소인 데다 일상적 권력 관계에서 발생한 성폭력은 형사 절차에서 누락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물론 동의 여부를 강간죄로 판단할 때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았다는 진술만으로 억울한 사람이 생길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현행 강간죄 법령이 실제 강간으로 고통받는 여성의 현실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동의 여부가 강간죄 기준이 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피해자가 술에 취해 무방비 상태인 경우나 피해자가 금전적인 이유로 가해자에게 의존하는 경우, 종교 지도자·신도 간 관계 등 권력을 악용한 성폭력이 대표적인 사례다.

2021년 유엔 인권이사회가 채택한 ‘여성에 대한 폭력 및 그 원인과 결과에 관한 특별보고관 보고서’는 강간에 관한 국제법적 체계를 설명한다. 이 보고서는 특히 많은 국가가 ‘동의 없음’에 기반해 강간을 정의하고 있다고 전했다. 예를 들면 2016년 독일은 ‘거절은 거절이다’(no means no) 원칙을 반영해 강간 조항을 개정했고, 강간을 피해자의 인식 가능한 의사에 반한 모든 성행위로 봤다.

스웨덴은 한 발 더 나아가 ‘동의해야 동의다’(yes means yes) 원칙을 반영해 강간 정의를 바꿨다. 스웨덴 형법 제6장 제1항에 따라 강간 조항은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사람과 성관계 또는 침해의 심각성을 고려할 때 성관계에 필적하는 그 밖의 성적 행위를 하는 사람’에게 적용된다.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현재 일본이 폭행·협박이 없더라도 상대의 동의 의사 표명이 곤란한 상태서 성행위를 하면 강간죄로 간주하는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 방송 NHK 보도에 따르면 일본 법제심의회는 지난 3일 이 같은 내용을 담은 형법 개정안을 발표했다.

HRW는 성폭력에 취약한 한국 사회의 실태를 지적하면서 시급히 강간죄 관련 형법 개정을 촉구했다. HRW는 “한국은 디지털 성범죄 역시 만연해 있고, 피해자의 90%가량이 여성이다”면서 “한국 정부는 성폭력 척결을 위해 동의 없는 성관계를 강간 정의에 포함하고, 모든 피해자가 법적 구제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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