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군대를 공포에 떨게 한 옛 터키군의 ‘타악기’
그림, 클래식 악기를 그리다/장금
피아노·팀파니 등 6개 악기 통해
음악가와 유럽 문화·역사 등 소개
19세기 독일·프랑스 가정 중심 피아노 연주
왕정 복고·시민 저항 등 정치적 상황 때문
르누아르의 명화 ‘피아노 앞의 소녀들’(1892)을 보면 두 소녀가 피아노 앞에 다정한 모습으로 나온다. 부유한 시민계급 가정의 행복한 정경이 그림 전체에서 묻어나온다. 이 그림에서 피아노의 이미지는 경제적 능력을 갖추고 고상한 취미를 즐길 줄 아는 유럽 중류층 안락한 가정을 상징한다.
피아노는 일류 연주자들의 연주회 문화를 통해 발전함과 동시에 중류계급의 가정이라는 테두리를 통해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시민들의 피아노 사랑이 꽃필 수 있었던 데에는 가정이라는 환경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다. 흥미로운 것은 피아노가 발명된 곳은 이탈리아지만 정작 이탈리아에서는 중산층 가정의 피아노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날씨가 좋아 따뜻한 햇살 아래 옥외 문화가 발달했기 때문이다. 반면 중산층 가정의 피아노 문화가 꽃피운 곳은 독일과 프랑스 등이었다. 비교적 일조량이 적은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거실에서 가족 구성원들이 한데 모여 소소한 일들을 함께 즐기는 문화가 발달했다.
가정 중심의 중산층 문화가 발달한 것은 당시 복잡한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19세기 초중반까지의 유럽은 전쟁도 많이 발발했고, 프랑스 혁명 이전의 구체제로 복귀하려는 왕정복고의 움직임, 통일국가를 이루려는 민족주의, 그리고 자유를 갈망하는 시민계급들의 극렬한 저항이 한데 뒤엉킨 혼란의 도가니 그 자체였다. 이러한 정치적 소용돌이 가운데 시민들이 택한 방법은 가정 안으로 침잠하는 것이었다.
당시 시민 생활의 중심이 가정의 거실로 옮겨지다 보니 가구를 중심으로 가정을 꾸미는 것 또한 사람들의 큰 관심거리 중 하나였다. 거실 문화의 중심이 된 피아노는 악기이자 가구이기도 했다. 피아노의 크기와 가격, 그리고 피아노를 중심으로 좌석이 배치된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피아노는 고급 가구였던 셈이다. 세바시티앵 에라르(1752~1832)나 존 브로드우드(1732~1812)와 같은 초기 피아노 제작자들이 고급 가구 제작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19세기 유럽에서 피아노 연주회는 대규모 공연장에서 열리는 공공음악회와 사교를 위한 공간인 살롱 연주회로 나뉘었다. 리스트는 대규모 공연장을, 쇼팽은 살롱을 선호했다. 쇼팽은 평소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싫어해서 주로 살롱에서 연주했다. 18~19세기 유럽의 살롱은 음악가들이 동료 음악가와 교류하고 후원자를 만나고 새로운 음악을 선보이는 중요한 장소였다.
<그림, 클래식 악기를 그리다>는 바이올린, 피아노, 팀파니, 류트, 플루트, 하프 등 6가지 클래식 악기를 키워드로 악기와 악기 제조의 역사, 악기를 사랑한 음악가와 그들에 얽힌 에피소드, 유럽의 문화와 역사 이야기를 아우르는 책이다. 저자는 서울대 음대 작곡과(이론 전공)를 졸업하고 프랑스 소르본대(제4대학)에서 음악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서울종합예술학교 실용음악학부 전임교수를 지냈다.
책에는 클래식 악기를 매개로 유럽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부분들이 자주 나온다. 화음을 강화하는 타악기인 ‘팀파니’를 소개하면서 서양 군대를 공포에 떨게 한 옛 터기 군대의 비장의 무기는 악기였다고 전한다. 팀파니는 11~13세기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서유럽인들이 접한 신비한 동방 문물 중 하나였다. 당시 동방에서 들여온 팀파니의 원조격 악기는 네이커(naker)라 불렸다. 지름은 6~10인치 정도였고, 어깨나 허리에 끈을 매고서 연주했다. 서유럽인들에게 오스만튀르크는 종교적이고 군사적인 이유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터키군이 공포스러웠던 이유는 의외로 ‘소리’ 때문이었다. 당시 유럽인들에게 터키 군대의 음악 소리는 너무나 위협적이었다. 전 유럽을 떨게 했던 터키 군대의 굉음은 수많은 타악기에 있었다. 강력한 소리로 적군의 심리를 압박했던 터키의 군대 음악은 유럽에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유럽 지도자들은 터키식 군악대 조직을 탐내기 시작했다. 폴란드의 아우구스투스 2세를 필두로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랑스 군악대에서 터키식 타악기 편성을 도입했다.
‘아일랜드의 자존심’ 기네스 맥주가 하프를 사랑한 이유도 흥미롭다. 기네스는 1862년부터 지금까지 하프를 로고로 사용해왔다.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악기가 하프이다. 중세 아일랜드에 살았던 민족 중 하나인 게일족의 모든 부족에는 상주 하프연주자가 있었다. 이들은 부족 리더들을 위한 애가(哀歌)를 작곡하고 전쟁터에 동행하는 등 부족 생활의 중심에 있었다. 이들을 향한 사람들의 존경심은 특별했고, 이 전통이 이어져 아일랜드에서는 하프 연주자들의 위상이 매우 높다고 한다. 장금 지음/북피움/320쪽/1만 9800원.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