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필경사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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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봉 한호(1543~1605)는 명실상부 서예 대가이지만, 그의 글씨를 폄하하는 이도 드물지 않았다. 속되어서 기껏해야 사자관(寫字官)에나 어울릴 법하다는 것이다. 이때 사자관은 왕의 명 등을 공문서로 작성하는, 미관말직이지만 상당한 전문성을 요하는 조선시대 관원이었다. 석봉은 꽤 오래 사자관으로 일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사자관으로서 충직했는데, 그의 글씨가 너무나 훌륭해서 다른 사자관들이 다투어 모방했다. 이후 조선의 공문서에는 ‘사자관체’라는 특유의 서체가 자리 잡았다고 한다.

그런 사자관을 떠올리게 하는 직업이 지금도 있다. 필경사(筆耕士)다. 손글씨로 문서 작성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이다. 예전엔 관공서에 필경 직무가 따로 있었다. 지금은 대부분 문서 작성이 컴퓨터로 대체되면서 거의 사라졌는데, 중앙정부 인사혁신처에 필경사라는 직책이 남아 있다. 대통령 명의의 임명장을 붓으로 작성하는 일을 한다.

중앙정부 필경사 보직은 1962년 처음 생겼다. 고위 공무원에게 주는 임명장을 대통령이 일일이 직접 적어서 만들 수는 없으니 필경사에게 그 일을 맡긴 것이다.

필경사는 줄곧 1명이었다. 첫 필경사가 30여 년을 근무했고, 이후 2008년까지 2명이 각각 순차적으로 후임을 맡았다. 필경사는 해마다 4000여 장의 임명장을 작성해야 한다. 그런데 2009년부터 대통령 명의 임명장이 5급 이상 국가직 공무원으로 확대되면서 일이 2배로 늘어났다. 그래서 1명을 추가 채용해 현재 필경사는 2명으로 운영된다. 요컨대 필경사는 역대 4명에 불과할 만큼 희소한 직책인 것이다. 요즘 시대에 붓으로 쓰는 임명장이라니 의아하겠지만, 정부는 공무원의 자긍심을 높이고 임명권자의 정성을 담으려는 취지라고 설명한다.

인사혁신처가 최근 새 필경사 채용시험 공고를 냈다. 기존 필경사 1명이 퇴직했기 때문이다. 응시 요건이 꽤 까다롭다. 서예 관련 분야에서 8년 이상 근무했거나 관련 분야 박사 학위를 취득한 사람 등이 지원할 수 있다. 원서 접수 마감일이 오는 27일인데, 새로 뽑힐 필경사는 역대 5번째 중앙정부 필경사가 된다. AI로 대표되는 디지털 만능의 시대에 필경사라는 직업은 오히려 더 귀하게 여겨진다. 붓 끝에 오롯이 담아 내는 사람으로서 품격과 긍지를 짐작하기 때문이다. 그 맥이 끊기지 않고 면면히 이어지길 바라 마지않는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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