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한 잔에 5가지 맛을 담다…마실수록 정이 가는 '정감' 막걸리 [술도락 맛홀릭] <7>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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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도락 맛홀릭] <7> 경남 하동 악양주조 '정감' 막걸리

'악양주조'의 대표막걸리 '정감(情感)'은 술병 디자인처럼 하얀색부터 검은색까지 '다양한 무채색'의 맛을 지녔다. 김보경 PD harufor@ '악양주조'의 대표막걸리 '정감(情感)'은 술병 디자인처럼 하얀색부터 검은색까지 '다양한 무채색'의 맛을 지녔다. 김보경 PD harufor@

가가호호 술을 빚던 시절이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졌던 가양주(家釀酒) 문화가 100년 만에 다시 부활하고 있다. 현재까지 발급된 지역특산주 면허만 1400건에 이르고, 해마다 새로운 양조장과 전통주가 탄생한다.

전통주엔 지역의 특색이 오롯이 담겼다. 지역에서 나는 재료로 술을 빚어, 특산음식과도 잘 어울린다. <부산일보>는 ‘술도락 맛홀릭’ 기획시리즈를 통해 부울경의 전통주 양조장을 탐방하며 지역의 맛과 가치를 재조명한다. 이지민 대동여주도 대표 등 전통주 전문가도 힘을 보탠다.

세계 111번째 슬로시티(Slow City) 인증을 받은 고장, 느림과 고요함이 깃든 경남 하동군 악양면에 가면 지역 특색을 꼭 닮은 전통주가 있다. 3대째 물려받은 가업에 ‘진실을 담겠다’는 찐양조인을 만나러 악양면 정서리로 향했다.

■ 내 고장 쌀과 물로 빚은 ‘악양의 술’

악양초등학교와 악양면사무소. 악양의 중심가에서 몇 걸음만 옮기면 예사롭지 않은 향을 풍기는 2층짜리 건물이 나타난다. 입구 나무 간판에 새긴 ‘악양주조장’이란 다섯 글자가 선명하다. 30여 년 전 악양면 3개 양조장을 통합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온 뒤, 줄곧 악양을 대표해 온 술도가다.

강산이 세 번 바뀌는 동안 한결같이 한자리를 지켜 온 이 양조장은 4년 전 큰 변화를 맞았다. 악양합동양조장에서 악양주조로 이름을 바꿨고, 술 익는 내음도 달라졌다. 손지배(65) 대표가 지역특산주 면허를 갖추고, 우리쌀과 우리누룩만 사용해 ‘진짜 전통주’를 빚기 시작한 것이다.

“몇 년 전쯤 온라인 판매를 알아보다가 수입쌀로 만든 일반 막걸리는 현행법상 ‘전통주(지역특산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뒤늦은 깨달음이었죠. 값싼 수입쌀, 수입밀누룩으로 빚은 막걸리를 우리나라 전통주라고 할 순 없지 않겠어요.”

경남 하동군 악양면 면사무소 인근에 위치한 '악양주조'. 30년 넘게 같은 자리에서 한결같이 악양을 대표하는 술을 빚고 있다. 경남 하동군 악양면 면사무소 인근에 위치한 '악양주조'. 30년 넘게 같은 자리에서 한결같이 악양을 대표하는 술을 빚고 있다.
악양주조 주차장에 있는 자전거와 말통. 양조장의 오랜 세월이 엿보인다. 악양주조 주차장에 있는 자전거와 말통. 양조장의 오랜 세월이 엿보인다.

손 대표는 망설임 없이 결단을 내렸다. 증조부와 아버지 대를 이어 온 전통 방식과 작별하고, 원재료부터 설비·제조 방법까지 모든 걸 바꿨다. 수입쌀 대신 하동지역에서 재배한 청정쌀과 진주곡자(누룩)를 쓰고, 옛날 독(항아리) 숙성조를 모두 스테인리스 제품으로 바꿨다. 냉방 설비도 갖춰 사시사철 적정 온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2대 대표였던 작은 아버지와 뜻이 맞지 않았지만 그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막걸리는 음식이기 때문에 ‘맛’의 전통을 이어 가고 맛을 더 발전시켜 나가는 게 중요합니다. 옛 방식대로 독을 사용한다고 해서 전통이 아니거든요.”

시골 양조장에서 혁신과 변화가 처음부터 호응을 얻은 건 아니다. 좋은 재료로 빚다 보니 판매가를 올릴 수밖에 없었고, 가격에 민감한 지역 특성상 판매량이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다.

‘이러다 먹고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난감한 상황이었지만 손 대표는 포기하지 않았다. 온라인 판매가 본격화하면서 조금씩 매출을 회복했고, 지금은 인근 구례와 광양은 물론 멀리 부산·광주·대전 등지에서도 꾸준히 애주가들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취재진이 방문한 날도 마찬가지.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양조장을 들락거리며, 냉장고에 보관된 술이 금세 동났다.

악양주조 손지배 대표가 우리 술에 대한 소신과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보경 PD 악양주조 손지배 대표가 우리 술에 대한 소신과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보경 PD
악양주조의 프리미엄 막걸리 '정감'(왼쪽)과 '악양막걸리'. 손 대표의 작은딸이 모든 디자인을 담당했다. 악양주조의 프리미엄 막걸리 '정감'(왼쪽)과 '악양막걸리'. 손 대표의 작은딸이 모든 디자인을 담당했다.

■ 정감 어린 향, 정감 가는 맛

손 대표는 우리 술을 향한 집념을 막걸리 2종에 오롯이 담았다. 첫 작품인 ‘악양막걸리’가 일반적인 탁주라면, 뒤이어 출시한 ‘정감(情感)’은 악양주조를 상징하는 프리미엄 막걸리다.

둘 다 우리밀누룩·우리쌀입국이 들어가는데, 멥쌀을 쓰는 악양막걸리와 달리 정감은 찹쌀을 사용한다. 특히 정감은 두 번 빚은 이양주여서 목 넘김이 부드럽고 향미가 깊은데, 알코올 도수도 8도로 악양막걸리(6도)보다 높다.

숙성 기간도 차이가 난다. 악양막걸리는 열흘 정도, 정감은 배 이상인 21~25일 동안 숙성한 뒤 출시한다. 이 과정에서 손 대표가 중시하는 게 ‘저온 발효’다.

“전통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온도의 예술입니다. 술 빚기는 물론이고, 완성된 술을 보관하고 공급하고 소비자가 마실 때까지 계속 적정 온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해요. 예전엔 경험치로 술을 빚었다면, 지금은 과학적으로 발효·숙성 과정에서 18~22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악양주조의 발효·숙성 시설. 손 대표의 작은 아버지가 운영하던 시절, 1974년도부터 쓰던 스테인리스 발효조가 있다. 악양주조의 발효·숙성 시설. 손 대표의 작은 아버지가 운영하던 시절, 1974년도부터 쓰던 스테인리스 발효조가 있다.
악양주조 발효조 안에서 익어가는 '악양막걸리'. 악양주조 발효조 안에서 익어가는 '악양막걸리'.

손 대표가 또 하나 강조하는 건 물이다. 예부터 물 좋기로 유명한 고장이어서 마을의 상수원으로 술을 빚는데, 악양의 명산인 지리산 형제봉 기슭에서 나는 약수다.

하동지역 청정쌀과 맑은 물, 저온 숙성이 어우러진 술맛은 어떨까. 악양주조의 대표격인 ‘정감’을 한 모금 들이켜자 한마디로 딱 표현하기 힘든 오묘한 풍미가 입안 가득 맴돈다. 달면서 쓰고, 새콤하면서 향긋하고, 은은하면서 담백하다. 흰색부터 검은색까지, 술병 디자인처럼 무채색의 다양함을 지닌 맛이다.

“악양주조의 술에는 제가 추구하는 ‘오미(五味)’가 담겨 있습니다. 알코올의 매운 맛인 ‘신미’, 달보드레한 맛인 ‘감미’, 유산균의 새콤한 ‘산미’, 그리고 마지막에 미묘하게 남는 떨떠름한 맛과 쌉싸름한 맛입니다.”

손 대표의 설명을 듣고 다시 음미하니 다섯 가지 맛 중 어느 하나만 특출나지 않다. 오미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정감 막걸리만의 개성을 완성한 듯하다. 이름처럼 맛을 보면 볼수록 정감 가는 맛이다.

악양주조의 막걸리는 우리나라 전통음식과 두루 어울린다. 양조장 인근 유명 여행지인 최참판댁에 들르면, ‘평사리토지장터주막’에서 다양한 음식과 함께 악양막걸리를 맛볼 수 있다. 오징어·새우 등 해물이 듬뿍 들어간 해물파전과 싱싱한 푸성귀를 버무린 도토리묵무침 등이 술맛을 돋운다.

책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에 등장하면서 널리 알려진 입석마을 ‘형제봉주막’도 악양주조와 짝을 이룬다. 두부김치 등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의 안주거리와 함께 주전자째 나오는 막걸리를 맛볼 수 있다.

'정감' 막걸리는 찹쌀로 두 번 빚은 이양주여서 풍미가 깊고 목넘김이 부드럽다. '정감' 막걸리는 찹쌀로 두 번 빚은 이양주여서 풍미가 깊고 목넘김이 부드럽다.

■ 3대에서 4대로, 익어 가는 술과 꿈

손 대표 부부가 2005년부터 20년 가까이 이끌어 온 악양주조는 어느새 4대째를 바라본다. 손 대표의 큰딸과 사위가 전통을 이어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

지금의 악양주조가 있기까지 가족의 도움이 컸다. 디자인을 전공한 작은딸이 술병과 팸플릿 등 각종 디자인을 도맡았고, 온라인 판매가 자리를 잡는 데에도 자식들이 힘을 보탰다.

“술 빚기가 고된 작업이지만, 우리 술의 전통을 이어 가야 된다고 생각해요. 소비자에게 좀 더 진실을 담아서 우리 고유의 술을 보급하고 싶습니다. 그게 제가 전통주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고요.”

손 대표는 올해 또 한 번 변화를 준비 중이다. 새 창고를 짓고 생산 설비도 늘려 여름께부터 본격적으로 수도권으로 판로를 확장해 나갈 계획이다. 하동지역 대표특산물인 악양대봉감이 들어간 프리미엄 막걸리도 연말을 전후로 출시할 예정이다. 지금의 양조장 2층은 리모델링을 해, 숙박을 하면서 술 체험도 하는 공간으로 활용한다는 구상이다.

하동군의 유명 여행지인 최참판댁에 위치한 '평사리토지장터주막'. 하동군의 유명 여행지인 최참판댁에 위치한 '평사리토지장터주막'.

평사리토지장터주막에 가면 해물파전·도토리묵무침 등 다양한 전통음식을 악양막걸리와 함께 맛볼 수 있다. 평사리토지장터주막에 가면 해물파전·도토리묵무침 등 다양한 전통음식을 악양막걸리와 함께 맛볼 수 있다.

전통주에 진심인 손 대표는 인터뷰 내내 우리 술에 대한 자긍심과 애정을 드러냈다.

“옛날, 집에서 빚던 가양주처럼 다채로운 맛을 지닌 전통주가 계속 나와야 합니다. 우리 술이 좀 더 발전할 수 있도록 정부와 지자체에서 관심을 가져 줬으면 좋겠어요. 우리 술처럼 5대 영양소와 인체에 유익한 균을 많이 함유한 술은 세계 어디에도 없거든요.”

현재 악양주조처럼 지역특산주 양조장이 받는 혜택은 ‘온라인 판매’ 정도다. 막걸리 원료까지 꼼꼼히 따지지 않는 일반 소비자 입장에선 지역특산주 여부를 떠나 500원 1000원 더 저렴한 술에 손이 가는 게 여전한 현실이다. 일반 막걸리 사이에서 묵묵히 맛의 전통을 지켜 나가는 악양주조는 부산·울산·경남권 명주(銘酒)가 되어, 수도권까지 이름을 알리겠다는 목표다. 4대를 잇는 전통, 우리 술을 향한 긍지와 집념, 그리고 지리산·섬진강의 청정 자연을 버무린 꿈이 악양에서 익어 가고 있다.

글·사진=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악양주조의 술을 주전자째 판매하는 입석마을 '형제봉주막'. 악양주조의 술을 주전자째 판매하는 입석마을 '형제봉주막'.

[기자들의 시음평]

▶김희돈 스포츠라이프부 부장

“오리지널 막걸리 향이다. 강한 첫맛에 비해 끝맛은 꽤 담백하다. 막걸리다운 막걸리다.”

▶남형욱 디지털미디어부 기자

“첫맛은 달고 끝맛은 새콤. 흔한 막걸리와 달리 탄산감이 적어 훨씬 고급스러운 느낌이다.”

▶이상배 디지털미디어부 기자

“달지 않고 누룩 맛도 약한데, 마신 뒤 입이 좀 쓰다. 간이 센 안주와 먹으면 어울릴 듯.”

▶이지민 디지털미디어부 에디터

“첫맛은 달짝지근, 뒷맛은 시고, 끝맛은 쓰다. 짭조름하거나 단 음식과 함께하면 좋을 듯.”

[전문가의 맛 코멘트]

▶이지민 대동여주도 대표

“입국과 누룩을 블렌딩해 만든 막걸리로, 입국 막걸리 특유의 향과 누룩에서 기인한 컬러가 술에 반영돼 있다. 곡물의 담백하고 새콤한 향과 함께 배의 속살, 수박 껍질 등에서 느껴지는 시원한 향이 어우러지고, 맛에서도 이 향의 속성이 이어진다. 라이트한 단맛과 산뜻하면서도 기분 좋은 산미가 함께 결을 이루며 전체적인 맛을 형성하고, 후미는 깔끔하게 떨어진다. 8도이지만 세게 느껴지지 않으며, 양은잔에 따라서 꿀꺽꿀꺽 마시다 보면 금방 한 병 비울 수 있을 것 같다. 술꾼용이다.”

-제품명 : ‘정감’ 막걸리

-양조장 : 악양주조(경남 하동군)

-내용량 : 750mL

-알코올 : 8.0%

-원재료 : 쌀·입국·누룩·정제수·혼합제제 등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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