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반 페루의 경제적 번영 뒤에는 멸치가 있었다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장하준
페루 바닷새들의 주된 양식
마른 새똥은 비료·화약 제조 사용
인공비료 개발로 가치가 사라져
음식 재료와 경제 이야기 버무려
멸치는 19세기 중반 페루가 누린 경제적 번영의 원인이었다. 페루가 멸치를 수출해서 돈을 번 건 아니었다. 당시 페루는 바닷새의 구아노(마른 새똥)를 수출해서 국가적 번영을 누렸다. 구아노는 질산염과 인이 풍부하고 냄새가 그다지 역겹지 않아서 인기 높은 비료였을 뿐 아니라 화약의 핵심 재료인 질산칼륨이 들어 있어서 화약 제조에도 사용되었다.
페루의 구아노는 태평양 연안의 섬들에 모여 사는 새들인 가마우지와 부비(얼가니새)의 배설물이다. 이 새들의 주된 양식은 생선, 특히 칠레 남쪽에서부터 페루 북쪽을 잇는 남아메리카 서쪽 해안의 영양소 풍부한 훔볼트 해류를 타고 이동하는 멸치들이다.
구아노로 인한 페루의 경제 호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호황이 시작된 지 30여 년쯤 지나자 과다 채취로 인해 구아노 수출이 사양길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1870년 대규모 초석(질산나트륨) 매장지가 발견되면서 구아노 수출의 쇠락으로 인한 영향이 한동안 상쇄되었다. 초석은 비료, 화학 제조에 사용될 뿐 아니라 육류 보존에까지 쓰이는 질산염이 풍부한 광물질이다.
그러나 1909년 독일의 과학자 프리츠 하버가 공기 중에서 질소를 분리하고 고압전류를 사용해 암모니아를 만들어 인공비료를 제조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또 다른 독일의 과학자 카를 보슈가 인공 비료를 대량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하면서 구아노를 비료계의 황제 자리에서 축출했다. 구아노보다 더 중요한 질산염의 공급원인 초석의 가치도 없어졌다. 이처럼 천연자원을 대체할 인공 물질 제조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경제 체제는 기존 시장(구아노 시장)을 완전히 파괴하고 새로운 시장(화학 비료 시장)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갖추게 한다. 고도의 기술력을 갖추면 자연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셈이다.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는 영국 런던대 경제학과 교수인 저자가 도토리, 코코넛, 멸치, 새우, 닭고기, 호밀, 라임, 초콜릿 등 18가지 재료로 요리한 경제 이야기다. 음식만이 아니라 역사, 정치, 사회, 과학 등 풍성한 재료를 한껏 버무려 냈다. 장마다 음식 이야기가 먼저 나오지만, 음식 재료를 소재 삼아 가난과 부, 성장과 몰락, 공정과 불평등, 민영화와 국영화, 규제 철폐와 제한, 복지 확대와 복지 축소 등 경제 현안들을 흥미롭게 풀어냈다. 경제와 관련한 각종 고정 관념과 편견, 오해를 깨뜨리면서 궁극적으로는 다 함께 더 잘사는 세상을 만드는 방법과 비전을 제시한다.
닭고기 사례는 공정한 세상을 위해서는 기회의 평등뿐 아니라 결과의 평등까지 보장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저자의 인도인 친구는 고국을 방문할 때 항공료가 월등히 싼 러시아 국영 항공인 아에로플로트를 이용했다. 그 친구와 같은 비행기를 탄 다른 인도인 승객이 자기가 채식주의자라면서 승무원에게 닭고기 말고 다른 식사를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승무원은 ‘아에로플로트가 사회주의 항공사여서 특별 대우는 없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저자는 “서로 다른 필요를 가진 사람들을 모두 똑같이 대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공평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불평등에 대한 논의가 오랫동안 잘못된 방향으로 진행돼 왔다고 전한다. 개인의 필요와 역량은 무시한 채 결과와 기회에만 초점을 맞춰 왔기 때문이다. 좌파는 모든 사람에게 결과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이 공평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개인마다 다른 필요와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우파는 기회의 평등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공정한 경쟁이 되려면 개인 간의 역량이 어느 정도는 균등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장하준 지음/부키/376쪽/1만 8000원.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