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원 칼럼] 자기정치의 부재, 낯부끄러운 현수막
논설실장
엑스포 실사 앞둔 부산은 벚꽃 천지
여야 합의로 정치 현수막도 사라져
어느 때보다 청명한 도시 미관 자랑
욕설·비방 현수막, 정치혐오 가중
여의도에 볼모 잡힌 문구 꼴불견
자기정치·지역정치 회복은 언제
벚꽃 절정이다. 지금 부산의 산은 벚꽃 동산이요, 거리는 벚꽃 천지다. 낮에는 꽃 무더기가 바람에 흔들리며 봄의 교향악을 울리고, 밤에는 꽃등을 환히 밝혀 봄밤의 달콤한 세계로 이끈다. 주말 지나고 비라도 오면 속절없이, 그리고 가뭇없이 스러지고야 마는 게 제 운명인 것을 알기에 벚꽃은 더 아름답고 찬란하다. 다행히 봄꽃의 향연 속에 2030부산엑스포로 가는 관문인 국제박람회기구(BIE)의 현지 실사가 내일모레 막 오른다.
아침 출근길에 ‘엑스포가 세긴 세군’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낙화를 아직 준비하지 않은 꽃그늘 아래로 청명한 도시 미관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토록 맑고 깨끗한 도시라니, 부산의 재발견이다. 실사단 맞이를 위해 정치 현수막을 일제히 걷어 내자 부산의 길거리 풍경이 사뭇 달려졌다. 이 적요한 아름다움은 언제까지 유지될까.
덕지덕지 나붙어 도시 미관을 해치는 것은 물론이고 욕설과 비방의 낯부끄러운 언어로 국민 정서에 막대한 피해를 부른 현수막은 부산은 물론이고 전국에 걸쳐 길거리 공해의 주범으로 꼽혔다. 당연히 수도권 비수도권을 가리지 않고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문제는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점이다. 현수막 공격의 화살이 고스란히 정치 혐오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모르는 곳은 정치권뿐이다.
현수막 정치에는 정치권 그들만의 특권이 작동하고 있다. 올해 들어 갑자기 정치 현수막 문제가 불거진 것은 지난해 12월 국회가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면서다. 지방자치단체의 허가를 받아 지정된 곳에만 걸 수 있었던 정당 현수막이 아무 곳에나 개수 제한도 없이 15일간 자유롭게 걸 수 있도록 했다. 형평성이란 눈을 씻고 찾아도 없으며, 현수막 제작 비용도 국고보조금이나 정치후원금에서 나가니 이런 후안무치가 없다.
통제 불능 상황을 더 심화하는 것은 현수막을 단속해야 할 구청 공무원들이 정치인 눈치를 보며 절절매고 있는 게 현실이라는 점이다. 과태료 처분 외에 별다른 제재 방안도 없고, 금액도 건당 10~20만 원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도 문제적이다.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들의 특권의식이 나라의 도시 미관을 해치고 자라나는 아이들의 정서에까지 악영향을 끼쳐도 개선의 기미가 없다. 법을 뜯어고쳐야 하는데 가만 놔두면 국회의원들이 나서 잘도 법을 바꾸겠는가.
여의도식 정치문법이 활개 치는 현수막은 한국정치의 후진적인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를테면 부산 곳곳에 내걸린 정치 현수막을 보자. 국민의힘의 ‘이재명판 ‘더글로리’, 죄지었으면 벌받아야지’와 더불어민주당의 ‘정순신 학폭·곽상도 50억, 검사 아빠 전성시대’ . 길거리정치에서도 완강한 양당 구도다. 다른 당은 제대로 명함도 못 내민다. 정치담론을 두 당이 장악한 인상이다.
더 문제는 똑같은 문구의 현수막이 국회의원 혹은 당협위원장의 사진과 이름만 바뀐 채 부산 곳곳에 내걸려 있다는 사실이다. 현수막에서도 중앙정치에 볼모로 잡힌 지방정치의 현주소가 잘 드러난다. 정치 현수막에 지역 현안이 등장하는 것은 가물에 콩 나듯 한다. 특정 정당의 인기가 높은 곳은 그 당의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말이 실감 난다. 지역을 대변하는 정치인보다는 중앙정치를 잘 대변할 ‘막대기 정치인’이 있을 뿐이다.
중앙정치에 볼모 잡힌 게 어디 지역정치뿐이랴. 여의도 정가에서는 ‘자기정치한다’는 말이 잘못하는 정치인을 비판하는 수사로 사용된다. 여야를 가릴 것 없이 소신에 찬 발언과 행동으로 정치적 야망을 펼치려 하면 사방팔방에서 주저앉히려는 세력과 맞서야 한다. 권력자의 뜻과 당의 방침에 어긋나면 가차 없이 조리돌림을 당한다.
BIE 실사단이 4월 7일 떠나면 ‘벚꽃 엔딩’에 맞춰 길거리는 다시 ‘정치 공해’에 노출될 것이다. 지역정치 자기정치는 없고 서울에서 붕어빵처럼 찍어 낸 현수막이 국회의원 당협위원장의 이름과 사진만 달리 한 채 부산 곳곳에 나부낄 것이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선거일 180일 전인 8월부터는 유권자의 1인 현수막 게시도 가능해져 현수막 난장판은 극을 달릴 참이다.
마침 국회가 30일부터 전원위원회를 열어 정치개혁특별위원회가 제안한 선거제도 개편안 논의에 들어간다. 국회의장을 제외한 현역 의원 299명이 모두 참석해 2주간 난상토론을 벌이는데, 전원위 자체가 2004년 이라크 파병 연장 동의안을 다룬 후 처음으로 열리는 것이어서 비상한 관심을 끈다. 정치개혁이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만큼 양당 체제의 줄세우기식 정치풍토를 혁신할, 정치인을 위한 선거제가 아니라 유권자를 위한 진정한 선거제로 거듭나기를 희망한다.
임성원 기자 forest@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