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국제음악제와 함께한 2박 3일] 원숙미·열정·색다름 어우러진 ‘음악 통영’의 봄날
바로크부터 현대까지
혁신적 음악극도 선봬
“음악 들려준다는 것
삶 이해하도록 돕는 과정”
사람으로 치면 지난해 성년의 나이 스무 살을 맞았던 통영국제음악제. 2023년 스물한 번째 음악회는 다시 시작하는 느낌으로 혼신의 노력을 다해 준비했다더니 지난 주말 뚜껑을 열어 보니 기대 이상이다. 개막 당일 기자회견에서 진은숙 예술감독이 “첫 예술감독을 맡은 지난해는 코로나19 때문에 계획한 것을 다 실현하지 못했는데 올해는 꿈꾸던 대로 100%를 할 수 있게 돼 기쁘다”고 언급한 것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달 31일 개막일부터 첫 주말 오후까지 2박 3일간 통영에 머물면서 7개의 공연을 보고, 중간중간 세 명의 음악가를 인터뷰했다. 음악과 함께한 ‘통영의 봄날’ 이야기를 시간대별로 정리한다.
■“통영국제음악제는 현대음악 축제가 아니다.” [3월 31일 오후 3시_개막 기자회견]
진은숙 예술감독이 개막 기자회견(부산닷컴 4월 1일 자 보도)에서 들려준 이야기다.
흔히 통영국제음악제를 현대음악 축제라고 부르는데, 진 감독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강조했다. 현대음악에 국한하지 않고 좋은 작품이면 어떤 형식과 시대의 것이든 거리낌 없이 선보이고자 했다는 게 발언의 취지다. 이에 따라 올해 음악제는 바로크부터 현대까지 모든 시기의 음악을 다루고 있다. 장르도 클래식 음악뿐 아니라 ‘북 오브 워터’(미셸 판 데르 아) 같은 혁신적인 음악극이나 ‘플렉트럼과 타악기 춤’(해리 파치) 같은 프로젝트도 포함했다. 윤이상의 음악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든 음악제이지만 윤이상 곡은 4곡이 연주될 뿐이다.
■통영국제음악제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 [3월 31일 오후 5시_해리 파치 : 플렉트럼과 타악기 춤]
지난해 내한을 추진했지만, 코로나19로 연기돼 올해 성사된 공연이다. 20세기 미국의 작곡가이자 이론가였던 해리 파치(1901~1974)가 만든 악기들이 미국 LA에서 통영국제음악제로 왔다. 세상에 단 한 세트밖에 없는 악기다. 예를 들면 비올라의 몸통과 첼로의 지판으로 만든 ‘어댑티드 비올라’는 무릎 사이에 끼우고 세워서 연주했다. 오르간처럼 생겼는데 기이한 소리를 내는 크로멜로디언, 고대 그리스의 현악기에 기원을 둔 키타라, 클라우드 체임버 볼, 박(gourd) 나무, 각종 마림바에 이르기까지 그가 고안한 20종의 악기를 만났다. 신종 악기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문제는 이 악기들이 없으면 파치 곡은 연주할 수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통영국제음악제가 아니면 보기 힘든 공연이라는 점이다. 공연 내내 9명의 연주자가 무대 위를 바쁘게 옮겨 다니며 이 악기 저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여덟 명의 인성과 관현악을 위한 ‘신포니아’ [3월 31일 오후 7시_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
통영국제음악제가 개막 공연에서 야심 차게 선보인 루치아노 베리오(1925~2003) 작품이다. 현악기, 관악기, 건반악기, 타악기로 구성된 오케스트라 자리 배치에서 당당하게 지휘자 앞 첫 줄을 차지하고 앉은 8명의 ‘인간 악기’(노이에 보칼솔리스텐 슈투트가르트)가 들려주는 ‘의미 없는 음운이 만드는 기악적 음색’이 매우 놀라웠다. 작품 제목 ‘신포니아’의 어원적 의미가 ‘함께 연주한다’라고 하더니 실감 났다. 이날 신포니아는 라벨의 ‘권두곡’과 찰스 아이브스의 ‘대답 없는 질문’ 사이에 끼워서 한 곡처럼 연주됐는데, 이는 다소 난해한 현대음악을 청중이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쉽게 들려주기 위해 진 예술감독이 고심 끝에 내린 생각이었다고. 덕분에 실험적 요소가 강했던 신포니아도 덜 충격적인 감상이 될 수 있었다.
■“음악을 들려주는 것은 삶이 무엇인지 이해하도록 돕는 과정” [3월 31일 오후 9시 30분_레오니다스 카바코스]
31일 밤 개막 공연이 끝난 후 대기실을 찾아간 기자에게 세계적인 거장 바이올리니스트 레오니다스 카바코스(56)가 들려준 말이다. 카바코스는 통영국제음악제 상주 음악가인데 총 4번의 연주 무대를 갖는다. 빡빡한 스케줄로 인터뷰 시간 잡기가 쉽지 않아 대기실에 선 채 인터뷰(부산닷컴 4월 1일 자 보도)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는데 어수선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꽤 진지한 답변에 기자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개막 공연 후반부에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를 연주할 때도 카바코스 특유의 카리스마와 무게감으로 무대를 지배하다시피 했다. 더욱이 진 예술감독이 “카바코스가 아니면 탄생하지 않았을 곡”이라고 말한 바이올린 협주곡 2번 ‘정적의 파편’을 아시아 초연하는 폐막 공연(9일 오후 3시)이 새삼 기대됐다. 정적의 파편은 지난해 세계 초연한 뒤 이번이 10번째 연주이다.
■‘빨간 양말’ 17세 소년의 무반주 첼로 독주회 [4월 1일 오전 11시_한재민 리사이틀]
2006년생 첼리스트. 2022년 윤이상 국제콩쿠르 우승자. 우승 당시, 얼마나 열정적으로 연주를 했으면 첼로 활을 세 번이나 갈아야 했다. 피아노에 임윤찬이 있다면 첼로엔 한재민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통영국제음악제에서도 티켓을 열고 나서 깜짝 놀랐다고 했다. 표가 너무 잘나가서 추가 오픈까지 했다. 실제 공연을 보니 ‘입틀막(놀라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것)’이다. 통영국제음악당 그 넓은 무대에 피아노 없이 오롯이 첼로 하나만으로 오른 자신감이 놀라웠다. 윤이상의 곡(활주) 선택도 좋았고, 바흐(첼로 모음곡 1번)와 리게티 그리고 코다이의 무반주 독주곡은 마치 대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그레고리안 성가처럼 평안을 가져다줬다. 지난해 콩쿠르 당시 신었던 빨간 양말을 트레이드마크처럼 신고 나온 걸 보면서 영락없는 10대구나 싶기도 했다.
■청중도 함께 완성하는 음악회 [4월 1일 오후 3시_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with 마티아스 괴르네]
모든 연주가 좋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마티아스 괴르네 연주가 나빴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이날 음악회 상황은 좋지 않았다. 오페라 가수로도 콘서트 가수로서도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는 독일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가 말러 연가곡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를 연주하던 중에 객석에서 박수가 나오자 연주자가 살짝 제지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마지막 곡이 끝나는가 싶은 찰나에 연주자의 마무리는 끝나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괴르네와 호흡을 맞춘 홍석원 지휘자와 국립심포니의 드보르자크 ‘정오의 마녀’와 라흐마니노프 ‘죽음의 섬’ 전반부 연주조차 빛이 바랠 뻔했다.
■김선욱의 원숙미가 완성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 [4월 1일 오후 7시_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
연주가 끝난 뒤 커튼콜만 3분 넘게 이어진 듯하다. 객석 여기저기서 “내 생애 최고의 연주”라는 말이 들려왔다. 여기엔 영국에서 합류한 로열 노던 신포니아가 절반 가까이 차지한 통영페스티벌 오케스트라(TFO)와 데이비드 로버트슨의 지휘도 한몫했다. 물론 통영국제음악제 상주 음악가 김선욱 피아니스트의 원숙미와 여유가 한껏 돋보인 무대였다. 라흐마니노프의 150번째 생일을 축하하고 헌정하는 의미로 정해진 레퍼토리인 동시에 ‘1호 매진 공연’ 타이틀처럼 관객들의 관심도 가장 컸던 공연이다. 라흐마니노프 곡 연주를 시작할 때만 해도 그러려니 했는데, 갈수록 폭발하는 에너지로 오케스트라를 휘어잡는 김선욱의 연주에 다들 감탄했다. 앙코르를 연주할 때 맨 구석진 자리 타악기 연주자 의자에 슬그머니 앉아 연주자를 바라보는 로버트슨의 모습도 감동이었다.
■마치 음반을 듣는 것 같은 정교한 실내악 연주 [4월 2일 오후 3시_에스메 콰르텟]
공연장에 입장하기 전 주최 측에서 배포한 한 장짜리 리플릿 앞면엔 네 명의 한국 여성이 각자의 악기를 들고 서 있는 사진이 실렸다. 뒷면엔 급하게 바꾼 듯 비올라 연주자 이름이 외국인으로 달라졌다. 사실 연주자나 연주곡은 주최 측이나 악단 사정에 따라 바뀔 수는 있다. 하지만 관객 입장에선 2018년 봄 런던 위그모어 홀 현악사중주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세계 무대에 혜성과 같이 등장한 그 연주자 그대로 보고 싶었던 마음도 없지 않아 약간은 아쉬웠다. 한데, 막상 연주가 시작되고 또다시 놀랐다. 하이든 현악사중주 30번 ‘농담’, 리게티 현악사중주 1번, 차이콥스키 현악사중주 1번으로 이어진 라이브 공연이 흡사 음반을 듣는 것처럼 정교하게 다가왔다. 한 명이 뒤늦게 합류했지만 이미 이뤄 놓은 세 사람(바이올린 1,2·첼로)의 찰떡궁합이 잘 커버했다. 대중성과 전문성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프로그램이 아니었을까 싶다.
■숨소리조차 내기 어려웠던 카리스마에 ‘쩔다’ [4월 2일 오후 5시_세르게이 바바얀 리사이틀]
한치의 미동이 느껴지지 않는 연주. 몸은 거의 고정한 채 양팔과 두 손을 사용해 피아노를 연주하는 동안 일분일초도 아까운 듯 손뼉 칠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음색의 마술사’ 세르게이 바바얀이다. 연주자를 직접 만나보진 않았지만, 매우 예민한 듯했다. 음악회가 시작되기 전 장내 방송이 나왔다. 연주자 요청으로 객석 조도를 더 낮춘다는 내용이다. 마침내 시작된 연주. 건반 위를 쉼 없이 내달렸다. 전반부 6곡(바흐 슈베르트 라흐마니노프), 후반부 2곡(리스트 슈만)을 이렇게 잇달아 연주해도 되나 싶은 정도였다. 조명이 어두워서 연주자 표정까진 볼 수 없었지만, 연주에서 느껴지는 풍부한 음색과 섬세한 강약 조절이 관객의 기를 압도했다. 생각지도 않은 앙코르 곡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아리아는 “역대급 연주”에 다시 한번 방점을 찍었다.
■통영국제음악당을 떠나며 [4월 2일 오후 7시 에필로그]
부산국제영화제(BIFF)에서 하루 영화 서너 편씩은 가끔 봤어도 사흘 내내 하루 두세 편씩 음악 공연을 본 건 처음이다. 공연장 안팎에서 숱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전문 연주자는 물론이고 음악 애호가, 문화 관련 단체 관계자 등 전국에서 온 이들이다. 매년 3월 마지막 주 금요일에 시작해 두 번의 주말을 끼운 열흘 동안은 통영이 우리나라 문화 수도라고 해도 손색이 없겠다. 다만 예전의 통영 시내 곳곳에서 열리던 프린지 공연이 없어지면서 통영국제음악당 주변만 시끌벅적한 축제가 된 점은 아쉬웠다. 통영국제음악제는 오는 9일까지 계속된다. 이제 겨우 절반을 지났을 뿐이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지기 전에 통영을 한 번쯤 찾아도 좋겠다. 5일 오후 7시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에서 최수열이 지휘하는 부산시립교향악단 연주도 예정돼 있다.
김은영 선임기자 key66@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