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기무사에 대한 기억
1880년 조선 정부는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했다. 통리는 통괄해 다룸, 기무는 근본이 되는 중요한 일, 아문은 관청을 일컫는다. 통리기무아문의 업무도 상세히 공시했다. 사대교린(事大交隣·외교) 군무변정(軍務邊政·군사와 첩보) 군물기계(軍物機械·병기와 기계 제조) 선함기연(船艦譏沿·선박 제조와 연안 순시) 어학전선(語學典選·외국어 교습과 인재 선발) 통상(通商) 등이었다. 국정의 근간이 되는 모든 업무를 맡긴 셈인데, 그만큼 통리기무아문에는 개혁에 대한 조선의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외세의 압력을 이겨 내고 나라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낡은 체제로는 불가능함을 절실히 느꼈던 것이다. 불과 2년 만인 1882년 폐지돼 실패했지만, 통리기무아문은 국정 혁신의 아이콘으로 기억된다.
1991년 국군에 기무사령부가 설치됐다. 전신이 보안사령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79년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킬 때 사령관으로 있었던 그 부대다. 전두환 당시 사령관은 불법으로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해 기계화사단과 특전사를 시위현장에 투입했다. 보안사는 1990년 또다시 계엄령을 준비하면서 사회 주요 인사 사찰을 벌인 사실이 폭로되자 변신을 꾀했는데, 그 결과가 기무사였다. 기무사는 보안사 때 악습을 버리지 못했다. 여전히 민간인을 사찰했고 선거에도 개입했다. 급기야 촛불시위가 한창이던 2017년, 전두환의 보안사가 그랬던 것처럼, 기갑여단과 특전사로 시위를 진압한다는 계엄령 문건을 작성한 사실이 드러났다. 군·검합수단이 수사에 들어갔고, 기무사는 이듬해 해체됐다가 2022년 방첩사령부로 이어졌다.
그 사건의 책임자로 지목된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이 미국으로 도주한 지 5년여 만인 지난달 29일 귀국해 이틀 뒤 구속됐다. 그는 내란음모 혐의도 받고 있다. 하지만 귀국 당시 그는 죄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도주한 게 아니고 단지 귀국을 연기했을 뿐”이라며 여유를 부렸다. 검찰은 그에게 수갑도 채우지 않았다. 인터폴 수배, 여권 무효화, 연금 중단 등 숱한 압박에도 꿈쩍 않다가 정권이 바뀌자 비로소 귀국한 그 배경이 무엇인지 알 길은 없다. 어쩌면 그는 기무사도 통리기무아문처럼 국정을 통괄해야 한다고 확신했을 수도 있다. 정말 그랬다면 국민을 군대로 진압하는 계엄 따위 대수롭지 않다고 여기는 것도 가능했겠다 싶다. 가소로우면서도 끔찍한 일이다. 대다수 국민의 기무사에 대한 기억도 그러할 테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