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의 지발도네(Zibaldone)] 자전거의 철학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극한 스포츠, 죽음 충동의 짜릿한 경험
몸이 힘들 때 철학적인 사유 촉발
자전거 보급은 역사적, 사회적 산물
더 나은 세상 만드는 계기 될 수도

날씨가 따뜻해지니 자전거를 타는 이들이 많아졌다. 나 역시 취미를 넘어 교통수단으로 자전거를 평소에 많이 이용하는 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달리기가 있다면 나에게는 자전거가 있다. 소설가 하루키는 소설을 쓰다가 잘 풀리지 않으면 달리러 나간다고 하는데, 나는 벽에 걸려 있는 자전거를 끌고 나간다. 책과 자전거는 정직하다. 많이 읽고 많이 타는 만큼 실력이 나온다.

두 부류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다. 몸이 편하면 즐거운 사람이 있고 몸을 힘들게 하면서 즐거운 사람이 있다. 나는 아무래도 후자에 속하는 부류다. 어릴 적 아버지는 틈만 나면 나에게 육체노동을 시키셨다. 멀쩡한 문짝을 뜯어서 조립한다든가, 시골 할머니 댁에 가서 흙담을 쌓는다든가, 이런 일들을 아버지와 함께하곤 했다. 동생들은 다 도망가 버리고 유독 나만 잡혀서 아버지 곁을 지키곤 했는데, 싫어도 싫은 티를 못 내고 묵묵히 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힘든 일이 즐거운 일로 바뀌는 경험을 했다. 자전거 타기의 경험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자전거는 혼자 타는 것보다 여럿이 타면 더 좋지만, 스포츠동호회 특유의 유대감이 다소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스포츠가 우생학과 결합하게 되면 아주 쉽게 능력주의로 귀결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회가 스포츠에서 위안을 얻는 것은 나쁘지 않겠지만 스포츠의 패러다임이 정치를 대체하는 것은 확실히 우려스러운 일이다. 이런 위험 요소가 없진 않지만 스포츠를 통해 얼마든지 철학적인 사유를 전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문제가 철학적인 사유의 대상일 수 있는 까닭은 ‘익스트림 스포츠’(극한의 모험과 위험을 즐기는 활동적인 스포츠)를 즐기는 이유 중 하나가 짜릿한 죽음 충동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우리 삶을 제한하는 절대적 부정성이고, 이 부정성과 마주치는 경험이 사유를 촉발한다.

도로에서 때로 자동차 못지않게 속도를 즐기는 로드바이크는 확실히 ‘죽음에 근접하는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내리막길에서 시속 60km 이상, 어떤 이는 80km 이상을 달려 내려오는 느낌은 ‘무아의 경지’를 체험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익스트림 스포츠는 죽음 충동에 이끌리는 짜릿한 경험이다. 이런 스포츠는 공통적으로 극단적인 육체의 피로를 수반한다. 장거리 달리기나 자전거 타기 같은 경우도 여기에 해당한다. 특히 자전거의 경우 한번 출발하면 100km는 기본이다. 아마추어가 이럴진대 프로페셔널은 더하다. ‘지로 디 이탈리아’나 ‘투르 드 프랑스’ 같은 사이클 경기가 관중을 매혹시키는 까닭은 이런 가혹한 현실에서 악전고투하는 인간의 육체성을 관전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위험한데 왜 그런 스포츠를 즐기는지 질문하는 것은 우문에 불과하다. 진실로 위험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전거 타기에 이런 내밀한 체험의 영역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엄연히 자전거라는 물건은 사회적인 산물이고, 때문에 역사적인 맥락을 가지고 있다. 흥미롭게도 현대 화가들 중에 이런 자전거의 의미를 포착해서 화폭에 담은 사례가 많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페르낭 레제가 그중 한 명이다. 레제는 미국을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신세계의 건설을 목격하고 노동을 찬양하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래서 그런지 레제의 작품은 유독 무엇인가를 건설하고 만드는 ‘남성’ 노동자의 모습을 많이 담고 있다. 그런데 이런 경향을 보여주는 레제의 작품 중에 ‘네 명의 사이클리스트’라는 제목이 붙은 그림이 하나 섞여 있다.

이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레제가 묘사한 네 명의 사이클리스트는 다름 아닌 여성들이다. 레제는 왜 이 사이클리스트들을 여성으로 묘사한 것일까. 그 이유는 역사적으로 자전거의 보급과 여성해방이 밀접하게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에 자전거는 남성들의 전유물이었지만, 점점 기술이 발전하고 일반적인 교통수단으로 자전거를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여성의 삶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중 하나가 여성의 패션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자전거를 타려면 치마보다도 바지를 입는 것이 더 편하다. 그러나 당시에 바지는 남성의 패션이었고 여성이 바지를 입는다는 것은 치마를 입지 않고 속옷만 입은 것으로 오해를 받았다. 이런 오해에 맞서 당당하게 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탔던 인물이 19세기 여성 아멜리아 블루머였다. 나중에 그의 이름을 따서 여성용 자전거 바지를 블루머즈라고 부르게 된다. 자전거와 여성해방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 레제의 그림을 보면 왜 화가가 이런 화제를 선택했는지 알 수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누군가 자전거 타기를 결심한다는 것은 결코 호락호락한 일은 아닌 셈이다. 여하튼 이처럼 자전거 타기는 세상을 더 낫게 만들 것이다.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