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갯마을 일광
“서(西)로 멀리 기차 소리를 바람결에 들으며, 어쩌면 동해 파도가 돌각담 밑을 찰싹대는 H라는 조그만 갯마을이 있었다”로 시작하는 단편소설 〈갯마을〉. 만주 등지를 떠돌다 처가인 기장군 일광에 1943년부터 3년간 머물렀던 난계 오영수가 쓴 〈갯마을〉은 일제강점기 고된 삶을 배경으로 바다를 떠나지 못하는 한 해녀의 인생사를 담고 있다. 소설의 배경인 일광은 부산의 어촌과 바다를 대표하는 상징성을 가진 곳이다. 1965년 영화 ‘갯마을’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일광(日光)의 명칭은 일광산의 아침 햇살을 가장 먼저 받는 곳이라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조선 인조 6년(1638)에 작성된 기장향교 상량문에 일광이라는 글귀가 발견될 정도로 오래전부터 전해지던 이름이다. 실제로 일광면 인근은 선사시대 고분군 100기가 존재하고, 왜구를 막기 위한 신라 토성 흔적이 남아 있을 정도로 오랜 거주지였다.
기장 8경의 하나인 일광해수욕장 나지막한 언덕 삼성대는 고려 말 정몽주, 이색, 이숭인 등이 경치에 반했던 곳이다. 이곳에 유배 온 고산 윤선도가 그를 만나러 한양서 온 동생과 헤어짐을 안타까워하며 읊은 시 두 편의 시비도 세워져 있다. 지금은 난개발로 원래의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일광해수욕장 오른쪽 끝의 학리마을은 이름 그대로 학이 무리 지어 오래된 소나무 숲 위를 울면서 나는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이런 역사적 전통 덕분인지 일광 등 기장군 5개 읍·면은 일제강점기에 치열한 항일운동으로 구수암, 권동수, 권은해, 김도엽, 김두봉, 김약수, 박영출, 박세현, 이도윤 선생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고장으로도 유명하다.
최근, 일광 학리마을에 본점을 둔 횟집인 ‘일광수산’이 지명 때문에 때아닌 ‘친일 논란’에 휩싸였다. 야권 성향의 한 유튜브 채널이 윤석열 대통령이 엑스포 실사단 격려 방문 이후에 들렀던 횟집 상호 일광을 놓고 ‘욱일기의 상징’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행정구역’ ‘친일 행보’라면서 친일프레임으로 비판하면서부터다. 아픈 역사를 잊지 않는 것이 모두의 책무이지만, 가짜뉴스와 이에 편승한 정치권의 추태를 엑스포 실사단과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의 미래 세대까지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철 지난 구호를 외칠 시간이면, 부산서 동해선 기차를 타고, 찰싹대는 파도와 장엄한 동해 일출을 감상한 뒤, 학리마을 일광수산 본점의 고소한 따개비죽 한 그릇으로 헛헛한 속이나 달래기를 바란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