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어떤 유대감 혹은 우정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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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남녀가 기차에서 만나는 ‘6번 칸’
1990년대 소련 붕괴 이후 배경
고고학 전공자와 광부의 이야기
같은 객실 쓴 3일간 감정 변화 포착

영화 ‘6번 칸’ 스틸 컷. 싸이더스 제공 영화 ‘6번 칸’ 스틸 컷. 싸이더스 제공

모스크바에서 고고학을 공부하는 핀란드 출신 ‘라우라’. 대학 교수이자 연인인 ‘이리나’와 1만 년 전 새겨진 고대 암각화를 보기 위해 러시아 북서부 항구도시 무르만스크 여행을 계획했다. 하지만 연인의 갑작스러운 여행 취소로 라우라는 홀로 기차에 탑승하게 되고, 2등석 6번 칸에서 그 남자 ‘료하’를 만나게 된다. 원래 이리나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앉은 낯선 남자는 곧장 보드카를 꺼내서 마시는 예의 없는 행동으로 라우라를 기겁하게 만든다.

처음 만난 남녀가 3일 동안 기차 객실을 함께 쓴다는 영화 ‘6번 칸’의 설정은 어쩐지 낭만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영화는 로맨틱과는 거리가 멀다. 사생활 보호는커녕 남자는 술에 취해 여자에게 술주정을 하더니 나아가 성희롱까지 하는 게 아닌가. 라우라는 료하와 마주치지 않는 게 최선이라 생각해 3등 칸에 자리가 있는지 알아본다. 식당 칸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그녀가 머물 수 있는 곳이 마땅치 않아 다시 6번 칸으로 돌아온다.

고고학과에 다니는 라우라와 러시아 광산 노동자 료하의 인생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겹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런 그들의 삶이 어느 순간 겹쳐지는 영화 ‘6번 칸’의 이야기는 어디서 들어본 것 같지만, 곧 이 영화가 주는 풍광과 기차가 뿜어내는 덜컹거림, 기계 파열음, 남자와 여자의 어색함 등 세밀하고도 낯선 감각은 지독히도 현실적이고 사실적이라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처음 접하는 영화적 감각일 것이다.

료하는 객실에서 술을 마시며 핀란드어로 ‘사랑해’는 어떻게 말하는지 따위를 묻는다. 상황을 험악하게 끌고 가는 그를 피하고자 라우라는 결국 기차에서 내릴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료하는 라우라에게 다가가지 못해 괜히 더 거칠게 굴었던 것임을 기차의 ‘이동’과 ‘정차’를 통해 서서히 알게 된다. 영화 속에서 기차가 정차할 때마다 라우라와 료하의 감정도 미묘하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처음 기차가 정차했을 때 라우라는 료하와 도저히 함께 생활할 수 없다고 판단해 배낭을 메고 기차에서 내렸다. 료하는 자신을 도둑으로 생각해 배낭을 가지고 내렸다고 생각해 라우라를 몰아붙인다. 이때 두 사람은 처음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내보인다. 자격지심을 가진 남자와 그런 남자의 행동이 불편한 여자. 그리고 어색하고 차가운 밤공기. 이후 기차가 반나절 정차하는 틈을 타 료하의 할머니가 사는 통나무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이 나올 때쯤 두 사람은 함께 있는 게 어색하지 않은 관계로 변해있다. 어느새 기차의 종착역이 다가오자 둘은 헤어짐을 아쉬워할 정도다.

영화의 묘미는 두 사람의 헤어짐, 즉 기차에서 내린 후부터 다시 시작한다. 눈보라로 아무도 접근하지 않는 장소이지만, 그곳에 꼭 가야만 하는 라우라를 위해 료하는 위험을 감수한 계획을 짠다. 좁은 6번 칸을 벗어나자 두 사람 사이에 감돌던 긴장감도 사라졌다. 그들은 좀 더 편안해 보이고 서로를 신뢰하는 듯 보인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낸 것처럼 웃고 장난도 치는 그들의 모습에서 어떤 유대감 혹은 우정을 발견한다. 그것은 사랑과는 다른 감정이다.

‘6번 칸’의 시대적 배경은 소련 붕괴 이후 1990년대를 그리고 있다. 유호 쿠오스마넨 감독은 그때의 감성을 담아내기 위해 캠코더, 워크맨, 공중전화, 음악 등과 같은 소품들로 아날로그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35㎜ 필름 촬영을 통해 러시아의 광활한 설원을 서정적으로 담아낸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좋은 파트너와 함께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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