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한배와 무사 안녕
최혜규 해양수산부장
‘주 69시간제’ 정부 근로시간 개편안 반발 계속
유연화보다 과로사 부르는 장시간 노동이 문제
지속 가능 노동 위해 노동자 목소리 귀기울여야
2018년 스물 다섯 살 3등 기관사 구민회 씨가 사우디아라비아 해상을 지나던 케미컬선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승선예비역으로 배에 오른 그는 2등 기관사의 욕설과 부당한 업무 지시로 괴로워했다. 유족은 가해자와 선장, 선박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최근 서울고법은 1심과 달리 구 씨의 죽음과 가해자의 괴롭힘 간 인과관계를 인정했다. 선장과 회사의 관리 책임도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배에서 내리면 군 복무를 해야 하는 승선예비역이라는 취약한 지위에 주목한 결과다.
‘한배를 탄다’는 운명공동체라는 의미로, 직장 내 협동을 강조할 때도 종종 쓰인다. 배가 노동의 현장이라면 노동자의 취약성이 극대화된 공간의 상징이라 할 만하다. 고립된 환경에서 일과 생활은 분리되지 않고, 괴롭힘을 당해도 도움을 구할 곳이 마땅치 않다. 견디기 힘들다 해도 당장 배에서 내릴 수도 없다. 노동자는 배를 운항하려면 없어선 안 될 존재지만 관리자와 사용자 앞에선 을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대부분 일터에서 노동자가 처한 ‘취약한 지위’의 본질은 비슷하다.
정부가 근로시간 개편안을 공개하고 입법예고한 지 한 달 넘게 지났다. 현행 주 최대 12시간인 연장근로시간 관리 단위를 월 분기 반기 연으로 확대해 특정 주에 최대 69시간 근로를 허용하는 이른바 ‘주 69시간제’는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대통령이 ‘주 60시간 이상은 무리’라며 전면 재검토와 함께 MZ 세대(1980년대~2000년대 출생)를 콕 찍어 의견 수렴을 지시했다. 입법예고 기간은 끝나가는데 뾰족한 보완 방안이 나올지는 미지수다. 예외 없이 반대가 압도적인 여론조사 결과는 개편안의 근본 전제와 접근 방향이 잘못됐다는 뜻이다.
정부 개편안은 현행 주 52시간제의 한계를 배경으로 들지만 우리나라의 법정 근로시간은 엄연히 하루 8시간, 주 40시간이다. 하루 8시간 노동은 18세기 후반 산업혁명 때부터 노동자들이 싸워 쟁취한 권리다. 주 52시간제는 연장근로시간을 이미 12시간까지 유연화한 ‘주 최대 52시간 상한제’라 불러야 한다. 근로시간이 주 52시간을 넘어가면 업무와 질병의 연관성이 증가한다. 노동부 고시에 그렇게 나와 있다. 고시 상 과로사 인정 기준은 4주 동안 주 평균 64시간 또는 12주 동안 주 평균 60시간 일하다 사망한 경우다. 지난해 통계를 봐도 주 60시간 이상 일하다 뇌심혈관계질병으로 사망한 노동자의 93.4%가 과로사로 산재를 인정받았다. 유연 근무 전에 장시간 노동이 문제다.
양대 노총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청년을 내세우는 접근도 헛다리다. 대표 ‘MZ 노조’로 호출돼 정부여당·대통령실과 ‘치맥’ 회동을 한 새로고침 노동자협의회는 정부 안을 반대한다. 그들 스스로 MZ 세대를 대변하는 노조가 아니고, 양대 노총과 대립하지도 않는다고 선을 긋기도 했다. 규모로 보면 가장 많은 수가 속한 양대 노총 청년 노동자들은 노동부 장관을 개편안 토론회에 초대했지만, 장관은 나타나지 않았다. 50대 이하 모든 연령에서 정부 개편안 반대 의견이 더 높게 나타난다. 특정 세대나 특정 노조가 아니라 노동자의 목소리를 충분히 듣지 않은 것이 문제다.
기술혁신과 저성장 시대에 노동자는 갈수록 취약한 상황에 내몰린다. 대기업 제조업에 기존 생산직 중심 노조와 별개의 노조가 등장한 것도 예전 같지 않은 처우와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IT와 게임 기업은 직장 내 괴롭힘과 과로사로 몸살을 겪으며 노조를 설립했다. 미국에서는 대표적인 무노조 기업이었던 스타벅스와 아마존에 노조가 속속 조직돼 이변을 일으켰다. 노조 설립에 우호적인 젊은 노동자를 노조(Union)의 이니셜을 따서 U 세대라고 부르는 표현도 나왔다. 더 많은 노동자가 지속 가능한 노동을 할 수 있도록 더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2020년 스물 일곱 살 장덕준 씨는 심야 근무를 마치고 퇴근해 샤워를 하다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쿠팡 경북 칠곡 물류센터에서 일한 지 1년 4개월 만이었다. 사망 전 1주간 근로시간은 62시간이다. 장 씨의 어머니 박미숙 씨는 최근 한 간담회에서 정부의 개편안을 두고 “제발 그런 말 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정부는 “근로자들이 선택해서, 좋아서 일하게 한다”는데, 청년들은 “그게 아니라 먹고 살려고 일한다”고 했다.
과거 뱃사람들은 바다로 나가면서 풍어와 무사 안녕을 바랐다. 지금 노동자들은 직장을 선택할 때 급여보다도 ‘워라밸’을 먼저 본다. 건강과 존엄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 두렵기 때문이다. 일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살려고 일한다. 근로시간 개편안을 비롯한 정부의 노동 정책이 구민회 씨와 장덕준 씨 같은 죽음이 되풀이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기대한다.
최혜규 기자 iwill@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