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망각한 ‘가해의 역사’ 일본인이 밝힌다
한국과 일본, 역사 인식의 간극/와타나베 노부유키
관동대지진 학살, 조선의병 살육
“이 사실 아는 일본인 얼마나 될까”
<한국과 일본, 역사 인식의 간극>은 전 아사히신문사 기자가 한국에 대해 일본이 망각한 역사의 실체를 실증 자료로 밝힌 책이다. 실증은 힘이 세다.
1919년 조선의 3·1 운동 때 사망자 수는 900여 명이다. 이전에는 7600명으로 알려졌으나 한국에서 3·1 운동 100주년 때 새로 집계한 숫자다. 하지만 900여 명이 적은가. 19세기 일본 내전인 보신전쟁(戊辰戦争) 때 후쿠시마에서 막부파 300명 이상이 전사했다. 전사자 후손은 그 한이 깊어 10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반대파 마을의 후손과 결혼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300명의 죽음은 1세기가 지나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데 900명의 죽음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3·1 운동 희생자는 일본인들 기억에서 사라져버렸다”고 말한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3·1 운동을 국내외에 ‘매우 경미한 문제’로 처리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일본 무교회주의 사상가로 양심적 지식인인 우치무라 간조조차 미국인 친구에게 “미국인들이 문제 삼고 있는 대부분의 (3·1 운동 관련)잔학 사건은 하찮은 날조에 불과하다고 저는 확실히 믿습니다”라고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일본인들은 저들의 만행을 깡그리 망각했다는 것이다.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자 수는 6600여 명으로 기록돼 있다. 물론 일본은 이를 부인한다. 독일 외무성 자료에 의하면 조선인 학살자 수는 훨씬 더 많은 2만 3000여 명이다.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 소학교 아이들의 학살 목격 기록이 숱하다. “많은 사람이 조선인을 다리 위에서 칼로 베거나 쇠몽둥이로 때리고 창으로 찔렀다. 결국에는 강물에 던져버렸다.” “쇠갈고리 한 방으로 이미 죽은 사람을 다시 칼로 베고 죽창으로 찔렀어요.” 그런데 현재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의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하며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관동대지진의 학살자들은 주로 재향군인과 자경단이었다”며 “그들이 살의에 차서 과거 한반도나 내륙에서 저질렀던 만행을 다시 관동대지진 때 일본 내에서 재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과거에 어떤 만행을 저질렀던가. 동학농민전쟁 때 당시 일본군 기록에 따르면 토벌대가 처형한 동학군은 날마다 12명 이상이고 많을 때는 103명이었다. 나주 남문 인근에 사람 뼈가 쌓여 실로 산을 이루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집계할 때 동학군 희생자는 3만~5만 명으로 추정된다. 동학군을 살상한 660명 일본군 토벌대의 전사자는 단 1명뿐이었다. 동학군에 대한 일본군의 조치는 무자비하게 “모조리 살육한다”는 것이었다.
동학농민전쟁 때뿐만 아니다. 일본은 1907년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킨 뒤 군대를 해산했는데 그 해산 군인들은 의병으로 일어섰다. 저들의 <조선폭도토벌지> 집계에 따르면 싸움이 가장 치열했던 1908년 일본군은 의병 1만 1562명을 살육했다. 1911년까지 치면 일본군은 1만 7779명의 조선 의병을 살육했다. 저자는 “이런 사실을 아는 일본인은 얼마나 될까”라고 묻는다. 의병 토벌 당시 일본군 전사자는 136명에 불과했다. 저자는 조선 의병 사망자와 일본군 사망자의 이런 현격한 차이가 과거사를 보는 한국과 일본의 현격한 시각 차이와 똑같다는 것이다. 그 차이는 일본이 그들의 시야에서 가해 역사를 지워버렸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일본이 반성도 없이 아예 역사 기억을 지워버리는 태도로 일관해 왔는데 우리가 통 크게 일본에 주겠다는 면죄부가 과연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 일이다. 와타나베 노부유키 지음/이규수 옮김/삼인/268쪽/1만 8000원.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