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미가요 작곡가, 한국에 잠들어 있다
장순복 여행작가·대륙항공여행사 대표
부산관광협회와 후쿠오카관광협회는 1966년 10월 4일 자매결연을 맺었다. 후쿠오카의 옛 이름은 ‘하카다’다. 하카다는 장보고 시대 수출품이었던 해무리굽 청자가 출토되고 있는 해상 물류의 중심지였다. 여·몽 연합군이 두 차례나 상륙했던 곳이다. 사신으로 간 정몽주, 신숙주가 머무르기도 했다. 후쿠오카는 구로다 가문이 쌓은 성과 마을 이름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을 몰락시킨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공으로 받은 영지이기도 하다. 구로다 요시타카와 그의 아들 구로다 나가마사는 1592년 임진왜란, 1597년 정유재란 때 참전했다. 구로다 요시타카는 지략이 뛰어나 ‘귀모’(鬼謨)로 불리웠다. 일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 인물 10위에 선정되었다. 그의 일대기는 2014년 NHK 방송에서 대하 드라마로 방영되었으며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구로나 나가마사는 사각 철판 모양의 독특한 투구로 유명하다. 그는 기장 죽성리에 성을 쌓았으며 초대 번주가 된다. 그가 태어난 히메이지 성은 일본 최초 세계유산으로, 그 풍광이 너무도 아름답다.
부산테니스협회와 후쿠오카테니스협회는 1991년 5월 12일 교환 경기를 시작으로 32년째 교류하고 있다. 2020년 4월 6일 마쯔무라 도시아끼 회장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조문을 가고 싶었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올해 3월 18일 김영철 직전 회장과 협회 관계자 18명이 조도지를 찾아 참배하고 추도식을 가졌다. 후쿠오카협회 관계자와 유족들은 3주기를 앞두고 찾아주셨다며 감동했다. 김영철 회장이 추도사 말미에 형님이라는 표현을 쓰자 유족들은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했다. 마쯔무라 도시아끼 회장의 손자도 추도식에 참가했다.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 마음 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라는 묘비 명을 남긴 아사카와 다쿠미, 조선인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 뒤 조선 고아 1000명을 돌보며 헌신했던 소다 가이치 등 한일 간 가교가 될만한 역사 속 인물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마쯔무라 도시아끼 회장의 손자는 따뜻한 가슴으로 대한민국을 기억할 것이다. 일본 제126대 나루히토 천황 생일 축하연 때 애국가와 함께 일본 국가 기미가요가 연주되었다. ‘임금의 치세는 천대에 팔천대에 작은 조약돌이 큰 바위가 되어서 이끼가 낄 때까지’라는 가사는 일본 제60대 다이고 천황 때 만들어진 ‘고진와카슈 343번 단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고대 한국어로 쓰여진 만요슈를 번역한 학자들은 원문을 찾아내 향가라는 것을 밝혀냈다. 작곡은 독일인 프란츠 폰 에케르트가 했다. 1879년 3월 일본 정부 초청으로 해군 군악대 교사로 근무하며 20년 넘게 머물렀다. 1880년 일본 해군성의 요청으로 기미가요를 작곡했다. 1900년 2월 28일 대한제국 초청으로 군악대에서 사용할 각종 악기를 가지고 들어와 군악대를 만들었다. 1901년 9월 7일 고종 황제의 마흔 아홉 번째 생일날 대한제국 애국가가 연주되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면서 군악대가 없어진 후에도 조선에 자취가 남았다. 조선에 묻히고 싶다는 희망대로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됐다.
1945년 직후 일본 사회가 무슨 생각을 했고 군국주의가 남겨놓은 생채기가 얼마나 깊고 쓰라린 것이었는가를 우리는 모른다. 한·일 역사에 드리운 상흔은 언젠가 치유되고 한·일 관계는 반드시 개선될 것이다. 지난해 일본을 방문한 한국 관광객은 101만 2665명으로 조사됐고, 올해 3월까지 160만 명이 일본을 방문했다. 한국인 인기 여행지 1위가 일본이다. 부산을 찾는 일본인 관광객들도 급증하고 있다. 올 1월 부산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은 6만 3333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만 3828명)보다 3.5배 이상 증가했다. 국가별로는 일본(9448명), 대만(8637명), 미국(6331명) 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