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 시대 문화풍경] 카운트, 삶의 의미를 찾는 시간
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강사
벚꽃이 만발한 진해의 봄, 분분한 낙화마저 아름다운 풍경을 달린다. 진해중앙고 복싱부의 첫 훈련이다. 한눈에도 오합지졸이다. 박시헌은 1988 서울올림픽 복싱대회 금메달리스트다. 은퇴 이후 체육교사로 일하던 그는 왜 느닷없이 복싱부를 만들었을까? ‘카운트’(2023)는 시헌이 복싱 유망주 윤우, 툭하면 싸우고 욕하는 환주, 소심한 복안이와 함께 세상에 맞서 자신을 찾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유쾌하고도 따뜻하다. 레트로 감성을 자극하는 90년대 배경인데다 배우들이 맛깔스럽게 구사하는 경상도 사투리가 재미를 더한다.
시헌은 고집불통 학생주임이다. 학생 지도에 타협이란 없다. 당당하고 강인해 보이지만 상처가 깊다. 올림픽 금메달은 영광이 아니라 수치이자 멍에였다. 정당한 승부가 아니라 편파적인 판정승이었기 때문이다. 메달을 반납하려는 시도 역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자신의 뜻과는 무관한 일이었는데도, 확증편향에 빠진 세상의 지탄은 가혹했다. 도망치듯 링을 떠나 복서로서의 삶을 스스로 유폐할 수밖에 없었다. 편파 판정은 이긴 자와 진 자를 모두 죽이는 불공정한 세상의 민낯을 보여주었다. 1988년 그날은 교장의 강권으로 참관한 고교복싱대회에서도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었다.
윤우는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늘 패자였다. 기권패를 강요당하기도 했다. 승부조작 때문이다. 윤우에게 링은 비열한 세상의 축소판이나 다름없다. 다시는 복싱을 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던 시헌이 복싱부를 만든 까닭은 윤우의 좌절당한 꿈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향한 응시이기도 했다. 윤우는 세상을 향해 힘찬 어퍼컷을 날리며 꿈을 되찾아 가고, 막무가내 환주는 패배를 인정하는 법을 배우며, 소심한 복안은 두려움을 떨쳐낸다. 시헌은 결코 들추고 싶지 않았던 상처를 딛고 일어서 비로소 세상의 부당한 시선을 극복한다.
상처는 저절로 치유되지 않는다.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 “너무 힘들고 고되면 엎어진 자리에 그대로 누워있어라. 네 숨이 돌아오거든 그때 다시 딛고 일라가 싸우면 된다.” 카운트는 녹아웃으로 이어지는 절망의 시간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기 위해 준비하는 재기의 시간이다. 자신을 가다듬는 10초의 시간은 마침내 삶의 시간으로 흐른다. 삶이란 복서처럼 맨주먹으로 세상이라는 링에 오르는 일이다. 무릎이 꺾여 쓰러지는 나날에도 홀로 맞서야 한다. 다시 일어서는 용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삶의 의미다. “의미 있는 일을 해라”는 시헌의 충고에 만덕이 묻는다. “누나, 근데 의미가 먼데?” “그… 씨잘데기 있는 기” 쓸데없는 일이라 여겼던 만덕의 공상이 웹툰이나 먹방으로 실현된 이즈음이다. 우리네 삶에서 ‘쓸데’를 찾고, 마땅한 ‘노릇’을 하기는 지극히 어렵다. 의미 있는 삶이란 스스로 찾고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