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슈거플레이션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제로슈거(zero sugar, 무설탕) 열풍이 거세다. 예전엔 콜라 같은 탄산음료에서나 그러더니 지금은 소주에까지 제로슈거란 이름을 붙인 제품이 쏟아진다. 기실 설탕이 없었다면 비만, 고혈압, 통풍, 알츠하이머, 당뇨병 등 현대인의 숱한 질병이 지금처럼 심각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처럼 설탕이 만병의 주범으로 낙인찍힌 지 오래라 제로슈거 열풍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설탕을 완벽히 끊을 수 있을까. 답하자면, ‘아니올시다’에 무게가 실린다. 설탕(정확히는 그 달콤함)에는 쉽게 떨치지 못할 중독성이 있다. 중독은 뇌가 장악되는 것이다. 중독의 강도는 해당 물질이 얼마나 빨리 뇌에 닿느냐, 즉 속도에 비례한다. 강력한 중독 물질인 니코틴은 입에서 뇌로 전달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10초다. 그런데 설탕은 불과 0.6초다. 니코틴보다 20배 가까이나 빠르다. 설탕의 치명적 유혹은 거기에 기인한다.

지금이야 설탕 과잉의 시대이지만, 100여 년 전만 해도 설탕은 극소수 부유층만 즐길 수 있는 사치품이었다. 우리나라에 설탕이 알려진 건 고려시대인데,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설탕을 먹고 못 먹고에 따라 사람의 귀천(貴賤)이 갈렸다. 어머니 소헌왕후가 병이 났을 때 그토록 먹고 싶다던 설탕 한 번 올리지 못해 한이 맺힌 조선 임금 문종이, 어머니 사후에야 겨우 설탕을 구해 영전에 올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설탕은 왕조차 쉽게 구하지 못했을 만치 귀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은 서양도 마찬가지여서, 설탕의 종주권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도 불사했을 정도다. 근래 연구에 따르면 중세 십자군전쟁이나 근세 노예전쟁이 모두 그런 이유로 발생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설탕의 가격이 요즘 심상찮다. 이달 들어 형성된 국제 설탕 가격이 12년 만에 최고 수준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상승세는 가팔라지고 있다. 이 때문에 슈거플레이션(설탕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인도 등 산지에서 가뭄과 폭염 등 기상이변으로 생산량이 줄어든 탓이라고 하는데, 원인이 그렇다면 마땅한 해결책은 없는 셈이다. 정부는 이전에 비축해 놓은 물량이 있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지만,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 이미 시중 대형마트의 설탕 판매대가 텅텅 비어 있다고 한다. 아무리 몸에 나쁘다 해도 설탕, 그 달콤함에 대한 욕망은 억제할 수 없나 보다. 귀할수록 비쌀수록 욕망은 더하는 법인데, 어찌해야 할 것인가.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