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래의 메타경제] 행복해야 하는데
신라대 글로벌경제학과 명예교수
행복지수 중 사회적 지원·관용 낮아
경쟁과 서열화가 억압 장치로 작동
통합 정책으로 성장 동력 회복해야
당연한 것 같은 질문에 우리는 너무 인색해지고 있다. ‘우리는 지금 행복해지고 있는가’. 한 달 전에 어떤 분이 보내온 메시지를 통해 3월 20일이 ‘국제 행복의 날’이라는 것을 알았다. 매년 그날을 맞아 UN에서는 ‘세계행복보고서’를 발표하는데, 여기에는 각국을 대상으로 측정한 행복지수가 제시된다.
익히 알고 있는 것이긴 했지만, 올해의 행복보고서에서도 ‘행복이 소득순이 아님’을 다시 확인하는 마음은 착잡했다. UN은 소득 수준, 사회적 지원, 기대 건강 수명, 인생에서의 선택의 자유, 관용, 부정부패에 대한 인식 등을 근거로 각국 사람들의 행복 수준을 측정하는데, 한국은 종합 순위에서 137개국 중 57위를 기록했다. 특히 눈에 띄었던 것은 소득과 기대 건강 수명은 아주 상위권이었지만, 사회적 지원과 관용, 그리고 선택의 자유에서는 매우 낮은 점수를 받았다.
한국에서 사는 사람들의 행복도가 높지 않은 것은 돈 문제보다 빈약한 사회적 지원과 사람 관계에서의 억압과 같은 사회적 요인이 더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라는 보고인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 사람보다 정이 많고 친절한 한국 사람인데, 관용이 부족하고 선택의 자유가 낮다는 것은 선뜻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복되는 조사 결과는 깊이 새겨보아야 한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 오래 살았던 어떤 외국인이 자신의 궁금증을 담아 내게 질문을 해 온 적이 있다. 어떤 모임이나 식사 자리에서 참석자의 명패가 놓여 있지 않은 데에도 한국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의 자리’를 그렇게 잘 찾아 앉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우리라고 모두 그런 자리 찾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나름 상당한 눈치를 보아야 하고 머리를 굴려야 앉을 자리를 잘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리 찾기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자리 찾기가 한국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서열 관계를 표현하는 상징의 하나임은 부정하기 어렵다.
서열 관계도 하나의 권력이다. 흔히 권력이라면 정치 권력을 떠올리지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힘은 훨씬 넓게 곳곳에 퍼져 있다. 우리의 생활 곳곳에 문화라는 이름을 빌려 속속들이 파고들어 있는 서열 관계를 그래서 미시 권력이라 부른다. 정치적 권력과 같은 거대 권력은 워낙 크고 명확하여 누구의 눈에나 보이고 또 그런 탓에 작동 원리는 공개되고 일정한 견제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만, 자리 찾기와 같은 미시 권력들은 작고 부드럽다.
작고 부드럽지만 미시 권력은 은밀하고도 집요한 힘을 통해 사람들을 통제한다. 특히나 미시 권력 관계는 대부분 문화나 전통이라는 포장을 하고 있기에 그 속에 들어 있는 폭력성은 은폐되기 쉽다. 혹 폭력성이 밝혀진다 해도 피해자들에게 ‘별나다’라는 주홍글씨를 붙이면서 덮이기 마련이다.
우리 사회가 관용이 부족하고 선택의 자유가 낮다는 결과가 조사 때마다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은 문화로 굳어져 버린 미시 권력들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마침 행복의 날을 보내던 그 무렵 어쩐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소식들이 더 많이 들려왔다. 뉴스를 클릭하기 겁이 날 정도로 연령대를 가리지 않고 들려오는 자살 소식에 현기증을 느낀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저출생은 바로 이렇게 행복하지 않은 나라의 반영이다. UN 행복보고서가 제시하는 바에 따르면 한국인들의 행복도를 높이고 저출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지원을 늘리고 사람 간에 작용하는 관용도를 높이고, 사람을 억압하는 미시적 통제들을 벗겨 내야 한다.
문화로 굳어져 버린 경쟁과 비교, 그리고 서열화는 우리의 생활 모두를 규율하는 억압 장치가 되어 버린 지 오래이다. 이것을 기반으로 경제성장에는 성공하였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위한 일에 대한 과도한 몰입과 경쟁, 그리고 서열화의 깊은 골은 이제 국가의 존립 자체를 흔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가 내놓는 정책들은 여전히 기존의 정책 방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수도권 집중에서 보듯이 효율성을 앞세운 경쟁의 논리는 더욱 강화되고 있고, ‘사람을 갈아 넣었던’ 노동관에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산업으로서의 농업이 아닌 농촌 전체의 문제가 되어 버린 쌀 수매에도 기어이 경제 논리를 적용할 심산이다.
사회가 파편화되고 관대함이 사라질수록 더 경쟁하고 갈라놓는 정책이 아닌 통합의 수단들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국민 대다수를 점하는 농민과 노동자를 포용하지 못하는 거친 정책들이 정제되지 않은 채 그냥 던져지는 느낌이다. 국민이 행복을 찾아야 성장 동력도 다시 회복할 수 있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