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독도마뱀에서 당뇨병 치료제 나왔다
분자 조각가들/백승만
신약 개발 역사·뒷이야기 담아
플레밍, 우연하게 페니실린 개발
정교한 기술 통해 약 개발 과정도
BTS 지민의 솔로곡으로도 유명한 ‘세렌디피티(Serendipity)’. ‘오랜 준비 끝에 찾아온 행운’이라는 뜻이다. 요즘은 ‘우연히 찾아온 행운’으로도 쓰인다. 의약품 개발도 무수한 우연이 작용한 결과였다. 의약품 역사에서 세렌디피티의 대표적인 사례는 페니실린 개발이다. 1928년 8월 푸른곰팡이가 아래층에서 날아 올라와 위층 알렉산더 플레밍 연구실의 우연히 열려 있던 창문으로 들어왔다. 때마침 실수로 뚜껑이 열려 있던 샬레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플레밍은 여름휴가를 다녀온 뒤 방치해 뒀던 배양 접시에 있던 균들이 거의 죽음에 이른 것을 발견했다. 이를 이상하게 여겨 보았더니 웬 곰팡이가 균을 맛있게 먹고 있는 게 아닌가! 이 곰팡이를 이용해 만든 것이 바로 페니실린이다.
운으로 약을 찾아낸 사례는 더 있다. 1770년대 영국 맨체스터에서 의사로 활동한 윌리엄 위더링. 1920년대 전에는 의사가 쓸 수 있는 약은 많지 않았다. 간단한 병 치료 외에 위더링이 할 수 있는 일은 왜 자신이 환자를 치료할 수 없는지를 설명하는 일이었다. 그는 어느 날 부종으로 고생하는 여성을 진료했고, 두 달을 넘기기 어려울 것 같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얘기했다. 그로부터 6개월 뒤 그는 이 환자를 거리에서 만났는데 얼굴 혈색이 더 좋아져 있었다. 떠돌이 집시가 처방해 준 20개의 약초를 섞어서 달여 먹은 뒤 호전됐다는 것이었다. 위더링은 그 약초들을 하나씩 선별해 가며 단 하나의 약초를 찾았다. 심부전 치료제 ‘디기탈리스’가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분자 조각가들>은 의약품 개발의 최전선에서 연구 활동을 하는 과학자가 들려주는 신약 개발의 역사와 숨겨진 뒷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책 이름인 ‘분자 조각가’는 약을 만드는 화학자를 말한다. 저자인 백승만 경상국립대 약학대학 교수는 신약 개발 방법과 최신 트렌드에 정통한 의약화학자인 동시에 약학대학 학생들을 대상으로 약의 역사를 다루는 인기 교양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저자는 화학자들이 어떻게 신약 개발에 관심을 가졌는지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연금술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초기의 화학자들은 우연에 기대거나 동물이나 식물에서 영감을 얻어 신약을 만들었다. 당뇨병 치료제인 ‘엑세나타이드’는 동물에서 유래한 물질을 약으로 개발한 것이다. 과학자들은 미국 남서부의 사막 지대에 서식하는 아메리카독도마뱀이 혈당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도마뱀은 엑세나타이드라는 자신만의 특이한 혈당 조절 호르몬을 이용해서 먹이가 적은 사막에서 생존하고 있었다. 과학자들은 엑세나타이드가 인간의 몸에서도 비슷한 작용을 하면서도, 기존에 연구되고 있던 당뇨병 치료제보다 지속 시간이 길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약으로 개발했다. 더 나아가 엑세나타이드가 소화관에도 작용해 배가 부르다는 신호를 준다는 점을 이용해서 포만감을 늘리고 최종적으로는 살을 빼는 용도로 개량했다. 독도마뱀의 호르몬에서부터 이어진 연구는 현재 비만 치료제 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삭센다’로까지 이어졌다.
화학이 발전하고 인체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화학자들은 자연에서 얻은 물질을 넘어서서 보다 고차원적이고 정교한 기술을 동원해서 약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19세기에 개발된 바르비투르산으로부터 이어지는 수면제 개발의 역사다. 안전하고 부작용이 없는 수면제를 만들기 위해 분자 조각가들은 수백 년 동안 분자를 조각하고 다듬었다. 그런데 바르비탈, 페노바르비탈, 부토바르비탈, 펜토바르비탈로 이어진 역사는 의약계 최악의 흑역사인 탈리도마이드를 낳았다. 수면 효과와 진정 효과가 강했던 탈리도마이드는 입덧을 줄여주는 효과가 발견되어 많은 임산부가 복용했다. 탈리도마이드가 태아의 기형을 유발한다는 사실이 뒤늦게 발견되면서 탈리도마이드 사용이 금지되었지만 이미 전 세계적으로 1만 2000여 명의 기형아가 태어난 뒤였다.
하지만, 탈리도마이드는 현재 혈액암 치료제를 비롯한 다양한 치료제의 재료로 활용되면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탈리도마이드가 신생아에게 기형을 유발하는 작용 기전이 밝혀지면서, 그 작용을 역으로 이용해서 악명 높은 다발 골수종을 치료하는 방법이 개발됐다. 위험한 물질이 더 위험한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변신한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책 후반부에서는 최근에 유행하는 신약 개발 트렌드가 나온다. 화학자들이 생물학자, 동식물학자, 인공지능 개발자와의 협업으로 이루어 낸 성과도 소개한다. 또 코로나19 백신이 개발된 과정에서 어떻게 최신 의약화학 기술이 사용되었고, 그 기술이 미래의 신약 개발 과정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보여준다. 한 알의 약 뒤에 숨은 분자 조각가들의 치열한 고민과 노력을 보면 경외감이 생긴다. 백승만 지음/해나무/340쪽/1만 8500원.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