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일의 디지털 광장] 신념의 정치, 책임의 정치

김승일 기자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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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버 제시한 정치인 덕목
“신념과 책임 사이 타협 중요”

지금 대한민국은
지도자의 ‘신념’과 ‘책임’ 사이
어느 지점에 서 있을까?

김영삼 전 대통령의 쌀 시장 보호 공약 파기는 지지층에 큰 실망을 안겼다.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에서 농산물 수입 관세를 철폐하는 대신 국제 자유 무역을 선택한 것이다.

“대통직을 걸고 지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죄로 대국민 사과를 하고 머리를 숙였다. 민주화에 앞장선 지도자로서 농업을 고사 위기에 빠뜨리는 선택에 고통스러웠으리라. 이 결단은 한국 현대사에 전환점으로 기록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재임 중 일본 문화 개방을 추진했다. 일본 저질 문화의 식민지가 될 우려가 있다거나, 독도 영유권과 재일 교포 차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시기상조라는 식의 부정적인 반응 일색이었다.

세 단계로 나누어 진행된 문화 개방의 결과는 지금 우리가 모두 잘 아는 그대로다. 이는 진영을 초월해 인정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업적으로 남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미국과 FTA(자유무역협정)를 추진했다가 핵심 지지층이 등을 돌리는 바람에 곤경에 처했다. 노조와 시민 단체가 파업과 시위로 연일 반대 목소리를 높였던 것이다. 보수 진영의 공격으로 가뜩이나 좁아진 운신의 폭이 더 위축됐지만 그 위기를 뚫어 냈다. 개인의 유불리를 떠나 국가 지도자로서의 외로운 결단이었다고 역사는 기록한다.

목하, 전 세계에서 각광 받는 한류의 바탕에는 국가의 앞날을 내다본 지도자의 고뇌와 혜안, 그리고 결단이 있었다. 반도체, 자동차, 휴대폰 등속의 공산품에서 나아가 영화와 드라마, 스포츠 그리고 K팝에 이르기까지!

미국, 중국, 일본은 내수 시장이 커서 혁신에 대한 보상이 크다. 혁신에 성공해서 경쟁 우위에 올라서기만 하면 성공 보수가 어마어마하다는 의미다.

한국은 국내 시장의 규모가 작아 혁신 경쟁이 일어나기 힘들었다. 한국보다 잘살았던 나라들이 ‘중진국의 함정’에 빠져 주저앉은 것도 국제 경쟁에서 도태됐기 때문이다.

한국은 빗장을 열어젖히는 선택을 통해 전 세계로 시장을 넓혔다. 대외 무역을 통해 세계적 수준의 혁신 경쟁에 뛰어들어 경쟁 우위에 올라섰다. 그 결과, 전 세계 인구의 0.7% 미만인 나라가 세계 10위 무역 국가로 우뚝 선 것이다.

독일의 사회과학자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지도자의 덕목을 ‘신념(도덕) 윤리’와 ‘책임 윤리’로 설명한다. ‘신념 윤리’에 따르면 오로지 선한 신념을 실현하는 것이 목표라서 결과는 염두에 두지 않게 된다. 신념 윤리를 중시하는 정치인은 선한 의도였기에 나쁜 결과가 나와도 책임지지 않는다. 반면 ‘책임 윤리’에 치중하게 되면 예견할 수 있는 결과에 대해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전직 대통령들이 자신의 신념이나 지지층의 요구에 갇혀 있었다면 지금 전 세계에서 각광 받는 ‘메이드 인 코리아’는 없었을 것이다. 신념 대신 책임을 선택한 덕분이다. 이렇게 고비고비마다 국가의 명운을 책임지려던 지도자들의 고뇌가 있었기에 대한민국 성공 드라마가 탄생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국빈 방문을 마치고 돌아왔다. 환한 얼굴에 자신감이 넘쳐 보인다. 미국의 환대가 있었고, ‘워싱턴 선언’이 발표됐다. 물론 미국의 핵 공유 부인 해프닝과 함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반도체, 배터리 분야의 빈손에 대한 지적이 따라붙는다.

시시비비를 떠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반도에 큰 도전을 남겼다는 점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미국과 일본도 놀랄 정도로 밀착해서 한·미·일 동맹체의 밑그림을 향해 다가갔다. 미국 국빈 방문 전의 일련의 언행, 즉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가능성, ‘일본 무릎’, 대만 해협 등은 그 밑그림의 준비 과정이었던 셈이다.

이에 북한과 중국, 러시아는 반발하고 있다. 소원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적대적 관계로 비화될 소지를 남겼다. 등거리 외교 기조가 사라진 대신 아군과 적군으로 이분화되는 양상이다. 그 결과 한반도 주변이 한·미·일과 북·중·러 대결 구도로 치닫고 있는 상황은 아찔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5월 10일 취임 1주년을 맞는다. 그 1년 사이 느닷없이 일본과의 동맹이 거론되거나, 중국과 러시아와 긴장 관계로 발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지적은 여권 내에서도 나온다.

막스 베버는 지도자가 강제력, 즉 악마적인 힘과 관계를 맺는 사람이어서 특별한 자질과 윤리가 요구된다고 봤다. 그래서 신념과 책임 사이에서 타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지도자의 ‘신념’과 ‘책임’ 사이 어느 지점에 서 있을까?


김승일 기자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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