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CCTV 사각지대서 범행… 사건 입증, 오롯이 내 몫이었다”
[제3자가 된 피해자] 중. 부산 노래주점 폭행 사건
일면식 없던 50대 손님, 무차별 폭행
10분 실신 후 눈 뜨니 화장실 바닥
코뼈 나가고 콩팥 출혈·갈비뼈 골절
체포 직후 가해자 지인 전화로 위협
신변보호 안내 제대로 못 받은 피해자
“왜 평생 보복 두려움에 떨어야 하나”
평소와 다를 것 없었던 저녁, 김연정(66·가명) 씨는 일면식 없는 남성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김 씨는 코뼈가 부러졌고 콩팥에 출혈이 생겼다. 양쪽 갈비뼈에 골절상도 입었다. 김 씨는 머리에 가해진 충격으로 폭행 당시를 기억하지 못한다. 모든 일은 CCTV 사각지대에서 10분간 벌어졌다.
대책은 김 씨의 몫으로 남겨졌다. 사건 직후 가해자 지인이 김 씨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수사기관에서는 실질적인 신변 보호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사건 수사 과정을 알고 싶었지만 접근할 방법은 없었다. 결국 사건의 조각을 처음 맞춰본 것은 언론 보도를 통해서였다. 성범죄 의도를 의심하고 있지만 그 사실을 입증하는 것도 김 씨가 할 일이다. 김 씨는 최근 일어난 부산 동구 초량동 노래주점 폭행 사건의 피해자다.
1년 전 ‘부산 서면 돌려차기’ 사건과 똑같은 구조다. 피해자는 개인정보가 넘어갈 위험을 감수하며 민사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무엇 하나 변하지 않은 피해자 지원 시스템 속에 ‘노래주점 폭행’ 사건의 피해자 김 씨는 ‘부산 돌려차기’ 사건의 피해자가 걸어온 길을 그대로 걸을 수밖에 없다.
①2023년 4월 18일 자정 : 사건
김 씨가 운영하는 노래주점에 남자 5명과 여자 3명의 단체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1시간여 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신 이들은 오전 1시 18분, 술값 17만 3000원을 계산했다. 피의자인 50대 남성 박 모(가명) 씨를 제외한 일행들이 노래주점을 나선 시간은 오전 1시 43분이었다. 박 씨는 계단에 홀로 남아 있었다.
손님들이 가게를 떠났다고 생각한 김 씨는 가게 마감을 마치고 화장실에 들렀다. 그 순간 박 씨가 화장실에 들어와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김 씨는 정신을 잃었다. 10여 분 뒤 눈을 떴을 때 김 씨는 화장실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김 씨가 박 씨의 바지춤을 잡고 “왜 이러냐”고 물었지만, 대답 대신 발길질이 돌아왔다.
오전 1시 52분, 김 씨는 겨우 화장실에서 뛰쳐나와 카운터 전화기로 112에 신고했고 박 씨는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경찰은 박 씨가 김 씨와 단둘이 남겨진 약 10분간 폭행을 휘두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박 씨는 노래주점에 처음 방문해 김 씨와 모르는 사이다. 경찰 조사에서 박 씨는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별다른 이유 없이 폭행했다”고 말했다.
②4월 18일 4:00 : 위협
정신을 잃고 병원에 누워있는 김 씨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피해자 김 씨의 딸 이가은(38·가명) 씨가 전화를 확인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오전 2시 19분에도 같은 번호로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망설이던 가은 씨는 전화를 걸었다. 술에 취한 목소리였다. 전화를 받은 상대는 “왜 우리 일행이 구금돼 있느냐”고 따져 물었다. 그는 이후 경찰에 가은 씨의 연락처까지 물어본 것으로 알려졌다. 가은 씨는 “엄마에 이어 나까지 노리는 것 같아 두렵고 화가 났다”고 말했다.
김 씨는 사건 직후 경찰로부터 구체적인 신변보호에 대한 안내를 받지 못했다. 이에 대해 경찰은 피의자 구속으로 신변을 확보한 상황이라 보복 범죄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사건 2시간 만에 가해자의 지인이 직접 피해자의 번호를 찾아 ‘왜 구금을 시켰느냐’고 위협을 가했다. 보복은 가해자가 다시 찾아와 주먹을 휘두르는 것 말고도 다른 방법이 많다. 경찰대 범죄학과 한민경 교수는 “피의자는 구속돼 있었지만, 지인이 대신 보복할 수 있는 상황”이라며 “실무적 판단뿐 아니라 상황을 고려해 적극적으로 신변보호를 안내했어야 했다”고 밝혔다.
전화를 받은 가은 씨는 밤새 가능한 신변보호 방법을 알아봤다. 가은 씨는 “엄마의 직장까지 알고 있는 가해자가 금방 풀려나거나 간접적으로 보복을 해오지 않을까 두려워 접근금지신청 등 신변보호 방법을 직접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③4월 20일 11:00 ~ : 방치
김 씨의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가은 씨는 경찰에게 수사 상황을 물었다. 김 씨를 이렇게 만든 가해자는 누구인지, 10분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왜 폭행을 했는지 모르는 것이 많았다. 그러나 여러 번의 연락에도 끝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가해자 나이라도 알려달라고 경찰에 물었으나 개인정보라 알려줄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가해자가 50대 남성이라는 사건의 조각을 알게 된 건 언론 보도를 통해서였다.
CCTV도 뚜렷한 기억도 없는 상황에서 사건입증은 오로지 김 씨의 몫으로 남았다. 기억이 없는 김 씨는 CCTV 사각지대에서 본인에게 벌어진 일을 추측할 수밖에 없다. 가은 씨는 “최초 발견 당시 엄마는 옷을 입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엄마의 소변에서 피가 나왔다. 성범죄 시도나 의도가 없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며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 한 사건에 대해 알 수 있는 게 없어 답답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보복에 대한 두려움도 김 씨가 평생 짊어져야 한다. 가해자의 지인이 경찰에게 가은 씨의 개인정보를 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모녀는 두려움이 더 커졌다. 지금도 모녀가 수사기관에서 전달받은 신변보호 방법은 전혀 없다. 가은 씨는 “피해자는 가해자 신상부터 사건까지 접근할 수 있는 정보가 하나도 없는데 반해, 보복 위협에는 너무 쉽게 노출돼있다”고 말했다.
앞으로의 법적 대응부터 사건입증, 신변 보호까지 이제부터 김 씨 혼자 오롯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우선 가해자가 주소를 알고 있는 탓에, 22년간 운영해오던 김 씨의 노래주점부터 닫을 계획이다.
그렇지만 모든 걸 포기할 수는 없다. 가은 씨는 개인정보가 가해자에게 노출될 우려를 감수하며 민사소송까지 고려하고 있다. 가해자의 신상을 파악하기 위해 피해자가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지만 최소한 실체가 있는 두려움과 맞서 싸우고 싶다는 것이 모녀의 생각이다. 돌려차기 사건의 피해 여성 또한 그랬다. 가은 씨는 “왜 아무 잘못도 없는 피해자가 도망을 다니듯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양보원 기자 bogiza@busan.com , 안준영 기자 jyoung@busan.com , 변은샘 기자 iamsam@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