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5월, 지리산 녹음에 취하고 산머루 와인에 빠지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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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양에서 만난 봄]

경남 함양에서 지리산으로 향하는 길에 만나는 '지안재'. 구불구불한 형상이 꿈틀거리며 승천하는 용을 닮았다. 경남 함양에서 지리산으로 향하는 길에 만나는 '지안재'. 구불구불한 형상이 꿈틀거리며 승천하는 용을 닮았다.

5월은 푸르다. 바다의 파랑이 아닌 산의 초록이 어울리는 시기다. 시리도록 푸른 녹음을 눈에 담기 위해 부산 너머 경남으로 시야를 넓혀 본다. 지도 위 짙푸른 색으로 표시된 산 하나가 눈에 띈다. 우리나라 1호 국립공원인 지리산이다. 지리산은 경남 하동·산청·함양군, 전북 남원시, 전남 구례군 등 5개 행정구역에 걸쳐 있다. 이 중 함양군은 천왕봉을 비롯해 지리산의 주능선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고장이다. 지리산의 북쪽 관문, ‘지리산 제1문’이 있는 함양으로 향했다.

■ 구불구불 고개 넘어 마주한 민족의 영산

민족의 영산 지리산은 찾아가는 고갯길부터 명소다. 함양읍내에서 24번 국도를 따라 10분쯤 달리자 갈색 ‘지리산’ 이정표가 나온다. 화살표를 따라 ‘지리산 가는길’(지방도 1023호)로 접어들면 곧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된다. 사진 촬영지로 유명한 ‘지안재’다. 회전각이 90도가 넘는 커브 길을 한 번, 두 번… 모두 여섯 번 꺾어서 오르니 전망덱이 나타난다. 위에서 내려다본 지그재그 아스팔트 도로는 마치 흑룡이 꿈틀거리며 승천하는 형상을 닮았다. 고개를 쉬이 넘기 위해 터널을 뚫었더라면 만날 수 없었을 풍경이다.

아무리 성능 좋은 자동차·오토바이라도 지안재를 만나면 속도를 줄여야 한다. “안전운전 하세요.” 라이더들끼리 건네는 인사도 안전을 앞세운다. 간간이 걸어서 오르는 이들도 눈에 띈다. 완만한 경사도를 위해 여섯 번이나 구부려 만든 길이지만 그래도 만만찮은 오르막이다. 지안재와 오도재를 이어 마천면으로 넘어가는 ‘지리산 가는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있다. 아름다움을 담으려 드론도 심심찮게 날아다닌다. 도로변 주차장을 따라 그려진 수많은 낙서가 길의 인기를 실감케 한다.

지안재 인근 도로변 주차장에 그려진 낙서. 평일·주말 가리지 않고 관광객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지안재 인근 도로변 주차장에 그려진 낙서. 평일·주말 가리지 않고 관광객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지리산 제1문 '오도재'에서 바라본 풍경. 오른쪽 멀리 함양읍내와 천년의 숲 '상림공원'이 보인다. 지리산 제1문 '오도재'에서 바라본 풍경. 오른쪽 멀리 함양읍내와 천년의 숲 '상림공원'이 보인다.

지리산 가는길의 맨 꼭대기, 삼봉산과 법화산이 만나는 지점(해발 773m)에 ‘오도(悟道)재’가 있다. 임진왜란 때 승군이기도 했던 청매 인오 스님이 이 고개를 오르내리며 도를 깨쳤다고 해 붙은 이름이다.

오도재 정상엔 2006년 함양군에서 조성한 지리산 제1문이 우뚝 솟아 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지리산 못지않게 빼어나다. 오른쪽 멀리 함양읍내와 천년의 숲 ‘상림공원’도 눈에 들어온다.

오도재와 지리산 제1문을 넘으면 본격적으로 지리산을 조망할 시간이다. 1km 정도만 내려가면 탁 트인 전망의 지리산조망공원이 나타난다. 정자에 오르니, 안내도에 나온 풍경 그대로 천왕봉부터 반야봉까지 10여 봉우리가 한눈에 펼쳐진다. 지리산 능선의 자태를 좀 더 오래 마주하고 싶다면 바로 옆 ‘카페 오도재’에서 차와 빵을 곁들여도 좋다. 20대 귀촌 자매가 운영하는 ‘뷰 맛집’으로 입소문이 난 카페다.

고즈넉한 사찰에서 바라보는 지리산은 또 다른 감흥을 자아낸다. 지리산 3대 계곡 중 하나인 칠선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1520년 창건된 ‘벽송사’가 자리한다. 조선시대 선불교 종가를 이룬 벽송사는 한국전쟁 때 불에 탄 뒤 1960년대 중건됐다.

절 위편 공터엔 신라 양식의 삼층석탑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원래 대웅전과 함께 있었는데, 아래 부지에 중건하면서 석탑만 남았다. 석탑 주변에서 내려다본 벽송사는 본래 지리산과 한몸인 것처럼 조화롭다. 지리산은 능선과 봉우리, 계곡과 숲이 빚어낸 다채로운 풍광으로 또 한 번 마음을 매료한다. 벽송사의 범상치 않은 소나무도 눈길을 끈다. 절 뒤편 축대 아래엔 곧게 뻗은 ‘도인송’, 축대 위엔 앞으로 인사하듯 기울어진 ‘미인송’이 300년 넘게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벽송사 인근에는 함양8경 중 하나인 서암석불로 유명한 서암정사가 있다. 1989년부터 10여 년간 자연 석굴의 벽과 천장 전체에 정과 망치로 불상을 새겼는데, 조각 조각 스님의 정성이 느껴진다.

1520년 창건된 '벽송사' 뒤편, 축대 위에서 바라본 사찰과 지리산 자락. 1520년 창건된 '벽송사' 뒤편, 축대 위에서 바라본 사찰과 지리산 자락.
함양 8경 중 하나인 서암정사의 서암석불. 함양 8경 중 하나인 서암정사의 서암석불.

■ 지리산이 선물한 풍성한 산머루가 와인으로

지리산의 넉넉한 품은 볼거리뿐만 아니라 다양한 먹거리도 선물한다. 함양에도 산양삼, 흑돼지, 곶감 등 지리산의 정기가 스민 여러 특산물이 있다. 그 중 해발 400~600m에서 자생하는 산머루는 산 중의 보배로 불린다. 지리산 인근 삼봉산 기슭에 자리한 산머루테마농원 ‘하미앙 와인밸리’에 가면 산머루의 다양한 매력을 만날 수 있다. 1998년 수동면에서 출발해 2004년 지금의 터에 자리잡은 하미앙은, 부지만 1만 평에 이르는 경상남도 9호 민간정원이다. 지역명 ‘함양’을 고급스럽게 풀어낸 ‘하미앙’이란 이름부터 재밌다.

건물부터 정원까지 유럽풍으로 조성한 하미앙은 산머루 와인이 유명하다. 직접 재배한 산머루로 와인을 만들다가 지금은 인근 50여 농가에서 계약 재배한 산머루를 쓴다. 와인동굴과 숙성실에서 산머루 와인의 제조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주말에만 개방하는 와인숙성실엔 20개 숙성탱크에서 술이 익어간다. 숙성탱크는 사람 키보다 몇 배나 큰데, 탱크 하나가 와인(750mL) 1만 5000병을 만들 수 있는 양이다.

와인동굴 입구에 들어서면 국내에선 흔히 볼 수 없는 오크통 수십 개가 양 옆으로 놓여 있다. 100년 이상된 오크나무 한 그루로 만들 수 있는 오크통은 단 2개. 와인 숙성을 위해 한 번 쓰고 나면 재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귀한 몸이다.

와인동굴 안쪽에는 숙성탱크와 오크통을 거쳐 병입한 와인 수천 병이 옆으로 뉘인 채 숙성되고 있다. 왼쪽 2004년산, 오른쪽 2008년산 모두 병마다 하얀 먼지가 내려앉아,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하미앙은 2021년부터 수제 맥주도 만들고 있다. 와이너리와 브루어리를 함께 갖춘 이색 양조장인 셈이다.

'하미앙 와인밸리' 와인숙성실에 설치된 대형 숙성탱크. 탱크 하나로 와인 1만 5000병을 만들 수 있다. '하미앙 와인밸리' 와인숙성실에 설치된 대형 숙성탱크. 탱크 하나로 와인 1만 5000병을 만들 수 있다.
하미앙 와인밸리를 대표하는 와인동굴. 입구에서 프랑스산 오크통 수십 개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하미앙 와인밸리를 대표하는 와인동굴. 입구에서 프랑스산 오크통 수십 개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와인동굴 안쪽에서 숙성 중인 와인들. 와인동굴 안쪽에서 숙성 중인 와인들.

처음 하미앙을 방문하면 맨 먼저 입구 ‘팜마켓’에서 와인 시음과 함께 간단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시판 중인 2016년산 스위트와인과 드라이와인, 그리고 산머루즙을 내어 준다. 시음만으로 아쉽다면 레스토랑·커피숍에서 식사를 하면서 와인과 뱅쇼를 곁들일 수 있다.

하미앙 와인밸리는 산머루와 와인을 주제로, 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즐길 수 있는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가족 단위는 물론 3대가 함께 찾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와인족욕은 특히 어르신들에게 인기다. 족욕체험장에서 최대 70명이 동시에 족욕을 할 수 있다. 시음용 와인 한 잔으로 몸을 데운 뒤 족욕을 하면 혈액순환에 한층 도움이 된다. 적당히 뜨거운 물에 와인을 부은 뒤 발을 담그면 은은한 와인 향과 함께 온기가 서서히 온몸으로 퍼진다. 먹는 와인을 발에 양보하는 게 아까워 보이지만, 족욕엔 식용이 아닌 산패된 와인을 쓴다고 한다.

뱅쇼 만들기도 인기 프로그램이다. 카페에서 판매하다 반응이 좋아, 지난해부터 체험을 진행하고 있다. 끓는 와인에 사과·배를 비롯해 제철과일과 산머루청을 넣고 가열한 다음, 마지막에 계피·팔각향 같은 향신료를 넣으면 뱅쇼가 완성된다. 유럽에선 겨울철 감기 예방을 위해 음료처럼 마시기 때문에 어른뿐만 아니라 아이에게도 좋다. 그밖에도 산머루비누·폼클렌저 만들기 등 10여 가지 다양한 만들기 체험을 해 볼 수 있다. 하미앙 와인밸리는 매해 축제를 열다가 코로나 기간 중단됐다. 올가을쯤 정부 지원사업과 연계해 축제를 재개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니 기대해 볼 만하다.

글·사진=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산패된 와인을 이용한 '와인족욕'은 특히 어르신들에게 인기다. 산패된 와인을 이용한 '와인족욕'은 특히 어르신들에게 인기다.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직접 만들어 본 뱅쇼. 알코올이 거의 없어 어린이도 마실 수 있다.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직접 만들어 본 뱅쇼. 알코올이 거의 없어 어린이도 마실 수 있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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