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부산판 위키피디아를 위하여

박태우 기자 wideney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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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우 디지털미디어부장

브리태니커에서 온라인 위키피디아로
지식의 보고 백과사전도 시대 따라 변모
부산 이슈로 엮은 영상실록 부산피디아
시민에 유익한 지식콘텐츠 되도록 노력

기자가 대학생이던 1990년대 무렵에는 백과사전을 팔러 다니는 영업사원들이 대학에 상주하다시피 했다. 하드커버에 27권으로 구성된 한국어판 브리태니커세계대백과사전 전집이었는데, 전 세계 대학생은 브리태니커를 소장한 이와 그렇지 못한 이로 나뉜다느니, 이걸 발췌해 리포트를 쓰면 A플러스 학점은 떼놓은 당상이라느니 하는 영업사원의 현란하면서도 집요한 권유에도 다섯 달 치 하숙비와 맞먹는 책값 탓에 손가락만 빨곤 했다.

‘벽돌책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백과사전 세트는 당시 사회지도층이나 교양인을 자부하는 이들에게 필수품이었다. 실제로 그 두꺼운 걸 일일이 찾아 읽어 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테지만, 거실이나 서가에 꽂아놓기만 해도 집의 품격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기 충분했다. 철학, 과학, 역사, 문학, 예술, 체육까지 근대 인류의 발자취를 집대성한 지식의 보고를 소장한다는 것은 드디어 나도 지식인 대열에 합류하게 됐다는 자기 암시와 함께 끝 간 데 없는 지적 허영심을 채워주기에는 더할 나위 없지 않나.

하지만 1768년 첫 선을 보인 이후 세기를 넘어 지식 세계의 절대 권위로 군림해오던 브리태니커도 2000년대 들어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시대의 조류에 휩쓸려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브리태니커를 도서관의 먼지 낀 구석으로 밀어낸 것은 ‘네티즌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무료 온라인 백과사전’을 표방한 위키피디아였다. 위키피디아는 검토, 승인 과정을 생략하고 누구라도 글을 올리고 편집할 수 있다는 집단 지성과 공유, 협업의 철학을 바탕으로 출범했다. 인류 지식의 표준이라는 백과사전의 편찬 권한을 전문 편집인에서 일반 시민들의 손으로 돌려놓은 것이다.

팩트 체크 과정이 촘촘하지 못해 부정확한 정보가 올라가거나, 악의적인 가짜 뉴스를 이용한 ‘사이버 반달리즘’ 같은 폐해에도 불구하고, 위키피디아는 이 순간에도 매서운 기세로 인류의 지식과 정보를 집어 삼키며 커가고 있다. 올해 5월 기준으로 한국어판 63만 건을 비롯해 전체 일반 문서 수는 5500만 건을 넘으며, 한 달 방문자 수만 17억 명에 이른다. 시민들의 관심사가 반영되다 보니 헤겔의 법철학 뿐 아니라 부산의 랜드마크인 광안대교도 백과사전의 한 항목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다.

아쉬운 점은 한국판 위키피디아에 수록된 문건 수가 일본이나 중국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는 것이다. ‘인터넷 강국’이란 자부심이 무색하게 시민 참여가 그리 활발한 편은 못 된다는 반증이다. 특히나 부산 관련 정보량은 상대적으로 더 적다. 예를 들어 국내 최대 수산물 직판장인 부산공동어시장만 해도 짤막한 한줄 설명에 연혁 몇 줄을 덧붙인 것이 고작이다. 부산의 새벽을 깨우는 경매사의 시끌벅적한 호창 소리나 짙푸른 바닷빛을 머금고 팔딱팔딱 뛰는 고등어의 생동감은 찾아볼 수 없다.

이 같은 고민 속에서 올해 〈부산일보〉는 ‘부산피디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부산피디아는 부산 근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 사건, 랜드마크 등을 집대성해 소개하는 영상 실록이다. 공들여 만들어 놓은 콘텐츠도 재미가 없으면 관련 연구자들이나 찾아보지, 일반 시민들은 외면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기존의 백과사전과 같이 단순히 사실을 나열하기 보다는 영상 스토리텔링을 통해 기본적인 정보부터 맥락, 숨은 뒷얘기까지 부산의 인물과 사건, 이슈들을 시민들이 흥미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몄다. 무엇보다 오늘의 부산을 만든 각계 인사들의 생생한 육성을 구술 영상으로 남겨 사료적 의미를 더했다.

관건은 부산과 관련된 수만 가지 주제 중에서 무엇을 백과사전에 담느냐 하는 것이었다. 오랜 논의 끝에 1회에서는 일견 까칠한 듯 보이지만, 일단 한번 불붙었다 하면 공동체를 위해 몸을 던지는 역동적인 부산시민의 DNA를 소개하고 싶었고, 그 대표 인물로 ‘불멸의 투수’ 최동원을 선정했다. 2회에서는 항구도시이자 피난수도였던 부산을 상징하는 먹거리로 ‘길거리 대표 간식’ 부산어묵을 꼽고, 그 연원을 탐색했다. 제작 과정에서 만난 취재원들은 하나같이 “누군가는 후대를 위해 기록으로 남겨야하는데 기회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고 했다.

부산의 모든 것을 담겠다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기획으로 출발한 ‘부산피디아’가 소책자로 끝날지, 아니면 전집 세트로 완성될지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누가 알겠나? 작은 아이디어에서 태동한 위키피디아가 그랬 듯 시민들의 관심과 집단 지성이 모여진다면, 부산판 위키피디아의 탄생도 꿈만은 아닐 것이다.


박태우 기자 wideney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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