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원폭, 고통의 사슬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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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이었다. 일본 히로시마시 중심부 580m 상공에서 거대한 섬광이 터졌다. 인류사 최대 비극으로 꼽히는 원자폭탄의 가공할 폭발. 시내는 말 그대로 초토화됐다. ‘폭발 지점의 온도는 태양 표면 온도의 1만 배에 달하는 섭씨 6000만 도까지 올라갔다. 끔찍한 열기에 사람 몸속의 장기가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사람들의 살과 내장과 뼈가 녹아 없어졌다.’(김옥숙 〈흉터의 꽃〉) 그해 12월까지 대략 14만여 명이 죽었고, 후유증으로 숨진 이후의 사망자까지 합치면 20만여 명에 이르렀다. 그것은 지옥이었다.

당시 히로시마에는 강제동원 노동자를 비롯한 한국인 14만 명이 살고 있었다. 원폭 피해를 당한 5만여 명 중 3만 명이 사망했고, 2만 명의 생존자 중 1만 5000명이 귀국했다. 나가사키에서도 한국인 2만여 명이 피폭돼 1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한국인 피해자들은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외면받는 존재였다. ‘원폭 희생자 위령비’ 하나 세우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모진 싸움 끝에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인근에 비석을 올린 게 1970년이었다. 일본의 거부로 공원 바깥에 있다가 1999년에야 공원 안으로 들어간 사무친 역사가 있다. 나가사키의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는 1979년에 건립됐다.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이 가장 많은 곳이 경남 합천이다. ‘한국의 히로시마’로 불린다. 그 아픔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데, 피폭의 고통은 2, 3세대까지 유전으로 대물림되기 때문이다. 정부도 언론도 무관심한 까닭에 이들의 비극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 한국은 원전 밀집도 세계 1위의 오명을 자랑한다. 그중에서도 부울경이 최대 밀집 지역이라는 사실. 무슨 운명의 사슬처럼, 피폭의 고통과 함께 핵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최근 한반도 핵 위기가 고조되는 아찔한 상황이 겹친다. 히로시마에서 잉태된 비극이 결코 과거의 일일 수만은 없다는 것이 역사의 엄중한 경고가 아니겠는가.

엊그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9∼21일 히로시마 G7 정상회의 기간 중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참배하겠다고 밝혔다. 참배에서 그칠 일이 아니다. 역사의 억울한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제대로 된 지원과 배상을 논의하는 계기로 나아가야 한다. 한국 정부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일본을 강력하게 견인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다. 원폭 피해자들의 사무친 고통을 이제는 어루만져야 할 때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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