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 같은 영화 [남형욱의 오오티티]
디지털미디어부 기자
처음 '고수'를 먹었을 때가 생각난다. 화장품을 삼킨 것 같은 강렬한 향이 입과 코를 채웠다. 미나리, 깻잎과는 결이 다르다. 이게 '동남아의 맛'인가? 거부감도 있었지만, 특별한 그 맛에 익숙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컸다. 이후 쌀국수 같은 요리를 먹을 때마다 일부러 고수를 더 넣어달라 주문했다. 덕분에 지금은 고수 없는 태국식 요리는 상상할 수 없다.
태국 영화도 마찬가지다. 고수처럼 중독성이 강하다. '셔터' '샴'같은 호러 영화는 특유의 음산하고 축축한 분위기에 탄탄한 플롯, 상상력 넘치는 연출이 어우러져 많은 호평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태국의 정글을 소재로 한 예술 영화 '엉클 분미'는 2010년 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태국 영화의 작품성을 전 세계에 알렸다. 지난달 공개된 넷플릭스 '헝거' 또한 고수 같은 특별한 맛을 담고 있을까?
'헝거'는 천재 길거리 요리사 '오이'가 최고의 레스토랑 '헝거'에 스카우트되어, 무자비한 쉐프 '폴' 밑에서 겪는 우여곡절을 다룬다. 괴팍한 스승과 재능 있는 제자라는 설정은 '위플래시'가 떠오르지만, 플레처 교수와 네이먼이 음악을 통해 동화되는 과정을 보여줬다면 폴과 오이는 요리를 통해서 철저히 대립한다.
폴의 요리를 먹는 장면은 공포영화가 떠오를 정도로 기괴하다. 홍콩영화 '금옥만당'처럼 화려하고 먹음직스런 요리나, '리틀 포레스트'처럼 아름답지만 소박한 요리가 쏟아질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간다. 피처럼 붉은 소스를 입가에 묻히고 맨손으로 음식을 탐닉하는 고위급 관료들. 중세시대 화형식 같은 방식으로 구워진 음식을 둥글게 둘러싸고, 나이프와 포크를 들이대 고기를 뜯는 장면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폴의 요리는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이들을 한없이 미천하게 만든다. "음식을 살 능력이 있어도 허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폴의 말처럼, 인간의 본성은 결국 '배고픔'이라는 것이다.
반면 오이의 요리는 다르다. 영화 후반 신진 셰프로 떠오른 오이가 사교계 파티에 초빙되어 폴과 요리 대결을 펼치는데, 마지막으로 내놓은 요리는 집안 대대로 전해지는 레시피로 만든 볶음국수다. 우리나라로 치면 '어머니의 된장국'. 새로운 레시피 개발을 위해 법을 어기며 요리를 하는 폴과 정반대의 선택을 한 것. 가족들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냉장고 속 남는 재료를 털어 만들었던 볶음국수는 그 자체로 삶을 위로하는 음식이다. 오이의 요리는 평범하지만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담겨있다. 채워지지 않는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사랑 같은 따뜻한 온기다.
이렇듯 영화 '헝거'에는 사람의 욕망과 허영심, 가족의 사랑 같은 재료가 '단짠'을 이루며 조화롭게 맛을 낸다. 간이 알맞다. 고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고수가 좋은 이유는 강렬한 향이 아니다. 기름진 고기와 강한 양념이 특징인 동남아 음식, 비로소 고수가 들어가면서 완벽한 맛을 낸다. 그래서 '헝거'는 고수 같다. 맛있다.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