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트럼프니까
논설위원
사회 저명인사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Me too: 나도 고발한다) 운동이 5년째를 맞았다. 미투 운동의 계기는 2017년 10월 5일 자 미국 뉴욕 타임스 기사였다. 뉴욕 타임스는 “아무도 그를 해칠 수 없는 벽(Wall of Invulnerability)이 있다”면서 미국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범죄를 피해자 동의를 얻어 실명으로 폭로했다.
5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여성 작가에 대한 성추행 및 명예훼손 혐의로 500만 달러(약 66억 원)를 배상하라는 법원 평결이 지난 9일(현지시간) 내려졌다. ‘성추행 고발 여성은 악덕 돈놀이꾼’이라며 여성 폄하 발언을 일삼은 트럼프 전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대통령 출신 성범죄자’로 기록됐다. 뉴욕 타임스는 “미투를 촉발시킨 트럼프 본인에게 그 분노가 돌아왔다”라는 9일 자 칼럼을 게재했다. 실제로 2017년 1월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을 모욕으로 받아들인 여성들이 취임 이후 이민법 개정 반대, 교사 파업 등 각종 시위의 선두에 서면서 미투 운동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국내에서도 2018년 서지현 검사가 검찰청 내부 성추문을 폭로하면서 정치·문화계 등 한국 사회 전반의 민낯이 차례로 드러났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이 수감됐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3년이 지났지만, 생채기는 아물지 못한 모양새다. 박 시장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사망 3년 만인 오는 7월 개봉하면서 피해 여성에 대한 2차 가해 논란마저 커지고 있다. 정의당 류호정 의원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추모도 좋고 예술도 좋은데 인간이 됐으면 좋겠다”라면서 “‘우리 시장님이 절대 그럴 리가 없어’라는 집단 망상과 피해 여성에 대한 집단 린치, 사회적 낭비가 걱정”이라고 우려할 정도다.
미국에서는 법원의 트럼프 성추행 판결이 선거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거라는 관측이다. ‘트럼프니까(Because it’s Trump)’라는 유행어까지 나올 정도로 도덕성에 대한 기대는 원래 바닥으로 떨어졌고, 오히려 콘크리트 지지층만 결집하는 효과를 빚기 때문이다. 혹시나 한국에서도 미투 운동이 ‘절대 그럴 리 없어’라는 진실 공방으로 이어지면서, 팬덤 지지층 결집 시도로 비치지 않을까 우려된다. ‘나도 고발한다’는 미투가 피해자에 대한 배려와 성평등 인식 확산, 사회적 상처 치료를 통해 ‘함께 성장하자’는 운동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한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