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세계유산 가야고분군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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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어느 날 경남 함안에서 신문을 배달하던 고등학생이 말이산 아파트 공사장을 지나다 철 조각을 발견했다. 생선 비늘처럼 생긴 모양이 신기했던 학생은 담임교사에게 전했고, 심상찮은 물건임을 직감한 교사는 곧바로 문화재 당국에 신고했다. 철 조각은 다름 아닌 말갑옷의 일부였다. 지금 국립김해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는 말갑옷(보물 제2041호)은 그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철의 나라’ 가야의 실체 역시 새롭게 확인됐다.

그런데 함안의 고분들에 대한 발굴조사는 그보다 훨씬 전에도 있었다. 1910년대 초 조선총독부가 일본인 고고학자들을 대거 동원해 조선고적조사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가야 고분군 발굴에 나섰다. 그 시작이 함안 말이산의 고분들로, 1914년 도리이 류조라는 학자가 처음 조사했다. 이후 창녕 교동, 고령 지산동 등으로 일제의 가야 고분 조사는 확대됐다. 말갑옷은 왜 그때 발굴되지 않았을까.

일제의 발굴은 대단히 부실했다. 고분 하나에 못해도 2~3년은 걸리는 발굴조사를 1~2일 만에 마무리할 정도로 졸속이었다. 발굴 자체보다 임나일본부의 근거를 확보하는 게 우선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뜻대로 되지 않자 일제의 가야 고분 발굴조사는 1918년 이후 급격히 줄었고, 1920년 양산 부부총을 끝으로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가야 역사는 그렇게 다시 긴 어둠의 터널에 갇혀 있어야 했다.

가야 고분 발굴이 활기를 띤 건 1980년대 들어서였다. 각지에서 대규모 토목사업이 진행되면서 발굴조사도 줄을 이었는데, 부산 복천동 고분군과 연산동고분군, 김해 대성동 고분군 발굴이 대표적이다. 근래에는 가야가 백제나 신라 못지않은 국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5~6세기까지 전북 남원 등 호남에까지 영역을 확보한 역동적인 정치체였음이 확인됐다. 삼국유사에서 전설처럼 떠돌던 가야가 고분 발굴로 인해 비로소 우리 역사의 전면에 떠오른 것이다.

그런 가야 고분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확실해졌다고 한다. 우리 문화재 당국이 함안 말이산 고분군을 비롯해 김해 대성동 고분군 등 7개 가야 고분군을 묶어 세계유산 등재를 신청했는데, 이를 심사·평가하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최근 ‘등재 권고’ 판정을 내렸다는 게다. 100여 년 굴곡졌던 가야 고분 발굴 노력이 마침내 빛을 발하게 됐다. 모처럼 듣게 된 반갑고도 뿌듯한 소식이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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