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수의 지금 여기] 아바나와 부산
논설위원
피식민지 경험, 곡절의 근현대사
역사의 아픔 껴안은 항구 도시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 겹쳐 보여
국제 관광도시 도약 꿈꾸는 부산
피란수도 유산 유네스코 등재 위해
훼손 대신 문화적 자긍심 다질 때
쿠바의 수도 아바나를 생각한다.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에서 가장 큰 항구 도시. 아름다움 뒤에 사무친 역사가 서린 곳이다. 원래는 원주민의 땅이었다. 그 흔적이 이름에 남아 있다. ‘아바구아넥스’라는 추장 이름에서 따온 것이 아바나다. 타이노족이 살던 이 땅에 1492년 탐험가 콜럼버스가 도착했다. 그는 외쳤다고 한다. “이제까지 본 곳 중 가장 아름다운 땅.” 곧이어 스페인이 이 지역을 점령한 건 세계사에 알려진 대로다. 아바나의 굴곡진 역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아바나는 신대륙 진출의 전진기지였다. 아메리카와 유럽을 잇고 아프리카를 연결했다. 아메리카 안에선 식민지 항구 사이의 거점이었다. 북대서양 해류를 낀 환경적 요인도 컸다. 대륙을 왕복하는 시간이 짧아 수많은 선박이 모이고 흩어졌다. 요컨대 ‘전략적 요충지’였던 것.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쿠바는 1898년 독립한다. 아바나가 쿠바공화국 수도가 된 건 바로 그때였다. 미국 기업과 관광객이 몰려들었고 술과 향락이 스며들었다. 그런데 1959년 사회주의 혁명으로 쿠바는 또 다른 변곡점을 맞는다. 이후 아바나의 물질적 성장은 제동이 걸렸다.
아바나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소식은 6년 전부터 들리기 시작했다. 관광업의 부활이었다. 옛 시가지와 요새 등 오래된 유적지가 남아 있어 가능했다. 번성의 계기는 198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 그 이후 전 세계 관광객이 몰리는 ‘핫 플레이스’로 떴다. 그 일대가 이른바 ‘올드 아바나’다.
쿠바인은 자존심 있는 사람들이었다. 미국의 압박 앞에서도 혁명의 기품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물론 지금의 아바나는 과거의 명성에 기대고 있으니 아이러니하다. 그렇다 해도 문화유산을 그대로 간직하고자 했던 노력은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아픔의 역사는 삶이 되고 문화가 되었다. 쿠바 특유의 낙천성, 모든 걸 품고 섞는 융합의 지혜가 힘을 보탰다. 그 대가가 관광 수입으로 이어졌을 뿐이다.
아바나를 떠올릴 때 부산을 겹쳐서 본다면 너무 엉뚱한가? 100여 년 전 부산은 일제 대륙 침탈의 출발점이었다. 이후에는 한국전쟁 시기 피란수도로, 산업화 시기 수출입 물류 거점으로 기능했다. 우리나라 바닷길의 관문 ‘1부두’가 한국 근현대사의 살아 있는 증거다. 숱한 눈물, 피와 땀이 밴 곡절의 역사를 품은 장소가 피란수도 유산 9곳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추진은 부산의 정신적, 문화적 자긍심을 상징한다.
이런 와중에 최근 의미 있는 소식이 더해졌다. 우리나라 가야 고분군이 최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심사 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로부터 ‘등재 권고’ 판단을 받은 것이다. 그동안의 관례로 볼 때 사실상 등재 결정과 다를 바 없는 쾌거로 받아들여진다.
가야 고분군이 가치를 인정받은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현존하거나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유일한 또는 적어도 독보적인 증거’라는 세계유산 등재 기준 중 하나를 충족하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대표적인 가야 고분군으로 꼽히는 부산의 복천동 고분군이 제외된 점이다. 개발과 방치에 따른 부정적 영향 탓에 신청 단계에서부터 빠지고 말았다. 이 대목을 우리는 깊이 곱씹어 볼 필요가 있겠다.
세계인들이 아바나에 가는 것은 매혹적인 노래나 춤 때문만은 아니다. 파도 위로 흩어지는 부신 햇살과 강렬한 석양도 다는 아니다. 그런 건 황홀감을 선사하지만 이내 증발한다. 아바나는 마음을 흔드는 정신적 경험을 제공한다. “아픔 없는 사랑은 없다는 것. 그런 깨달음이 없다면 아바나의 기행도 헛된 동경일 뿐이다.” 오늘날 쿠바의 문학 현실이 이런 고백담을 담고 있더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 있다.
폐허의 끝자락에서 마침내 일어선 피란수도 부산의 저력과 에너지도 이와 유사하다고 본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은 물질의 영역을 넘어 인간의 정신세계까지 포괄한다.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이 보편적 의미를 지니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피란수도 부산 유산은 국내 최초의 근대 유산, 도심에 입지한 유산이라는 점에서 특별하고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
세계유산이 지역 활성화에 방해가 된다는 오해가 있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는 세계의 수많은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이제는 더 이상의 훼손이나 파괴가 없도록 유산의 가치를 지켜나가는 게 중요하다. 그러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찾는 데 지역사회의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다. 관광의 목적은 단순한 상업적 행위에 있지 않다. 관광객들은 한국을, 부산을 알고 싶어서 방문한다. 국제 관광도시로의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부산이라면 미래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세계 문화유산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자부심이 그 출발점이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