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업 생태계 뒤흔드는 맏형의 저인망식 인력 빼 가기

김민진 기자 mjkim@busan.com , 강대한 기자 kd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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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 1위 HD현대그룹 조선 3사
파격적 조건 내세워 인재 싹쓸이
2년 새 경쟁사서 400명 옮겨 가
공들인 인재 빼앗긴 타 조선사
수주 넘쳐도 인력 없어 조업 애로
반등 기회 잡고도 지역 경제 위축

조선업계 1위인 HD한국조선해양은 최근 업황 회복에 맞춰 업계 2, 3위인 삼성중공업과 한화오션은 물론 중형사 인력까지 닥치는 대로 쓸어 담고 있다. 경남의 한 조선소 현장. 부산일보DB 조선업계 1위인 HD한국조선해양은 최근 업황 회복에 맞춰 업계 2, 3위인 삼성중공업과 한화오션은 물론 중형사 인력까지 닥치는 대로 쓸어 담고 있다. 경남의 한 조선소 현장. 부산일보DB

“안 그래도 사람이 없어 난리인데, 젊고 일 잘하는 애들만 쏙쏙 빼 가니 환장할 노릇이죠.”

23일 오전 경남의 한 중형 조선소 간부는 전화기 너머로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모처럼 맞은 수주 풍년에 일감은 넘쳐나는데 정작 일할 사람이 없어 배를 못 만드는 일이 현실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일부 대형사의 도를 넘은 핵심 자원 빼 가기는 회사를 고사 위기로 내몰고 있다. 그는 “대형사에 인력을 뺏긴 중형사는 빈자리를 기자재 업체에서 수혈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이라고 언성을 높였다.

장기불황과 고강도 구조조정 후유증으로 인력난 역풍을 맞은 조선업계가 때아닌 '집안싸움'으로 시끌시끌하다. 논란의 중심에는 맏형인 ‘HD한국조선해양’이 있다. 한국조선해양은 HD현대그룹의 조선부문 중간지주회사다. HD현대중공업·현대미포조선·현대삼호중공업 3사를 거느리고 있다. 국내는 물론 전 세계를 통틀어 업계 부동의 1위다.

그런데 코로나 팬데믹 여파로 주춤하던 업황이 2020년을 전후해 살아날 조짐을 보이자 경쟁사 인재를 닥치는 대로 빼 가는 통에 공공의 적이 돼 버렸다. 실제 현대 3사는 업계 2, 3위 삼성중공업과 한화오션(옛 대우조선해양)을 비롯해 대한·케이조선 등 중형사 인력까지 쓸어 담았다. 최근 2년 사이 흡수한 인원만 400명이 넘는다.

경남 창원시에 사업장을 둔 케이조선(옛 STX조선해양)의 경우 생산관리, 설계 인력 287명 중 10%가 넘는 34명이 한국조선해양 계열사로 이직했다. 업계는 최근 케이조선의 주력 제품인 PC선(석유화학제품운반선) 시장을 장악한 한국조선해양이 대량으로 수주한 물량을 소화하기 위해 케이조선 인력을 대거 채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조선해양은 지난해까지 전 세계에서 발주된 PC선 65척 중 절반이 넘는 36척(58%)을 가져갔다.

전남의 대한조선은 기존 주력 선종인 유조선 외에 중형 컨테이너선, 셔틀탱커, LNG 이중연료 추진 선박을 수주해 사업 다각화에 나섰지만, 공들여 키운 인재가 대거 유출돼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할 판이다. 인력 운용이 제한적인 중형사의 경우 1인당 업무 범위가 넓어 유출 공백이 더 크고 충원하기도 쉽지 않다. 잔류 인원의 업무 강도가 높아져 전직을 부추기는 요인이 된다. 그렇다고 맏형 면전에 대고 불만을 토로하는 건 부담이다.

모처럼 수주 풍년을 맞은 지역 조선업계가 일감은 넘쳐나는데 정작 일할 사람이 없어 울상이다. 이 와중에 일부 대형사의 도를 넘은 핵심 자원 빼가기는 회사를 고사 위기로 내몰고 있다는 지적이다. 부산일보DB 모처럼 수주 풍년을 맞은 지역 조선업계가 일감은 넘쳐나는데 정작 일할 사람이 없어 울상이다. 이 와중에 일부 대형사의 도를 넘은 핵심 자원 빼가기는 회사를 고사 위기로 내몰고 있다는 지적이다. 부산일보DB

삼성중공업, 한화오션 같은 대형사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업계에 따르면 한국조선해양은 파격적인 채용 편의와 처우 인상 등을 내세워 경쟁사 인재를 유인하고 있다. 특히 한화오션은 현대중공업과 인수합병이 최종 무산된 작년 1월 이후 인재 유출이 눈에 띄게 늘었다. 2021년 2명에서 지난해 165명으로 급증했다. 현대가 M&A 실사 과정에 수집한 내부 정보를 우수 인재 영입에 악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후유증도 심각하다. 유실된 인력 대부분은 잠수함, 수상함 등 방위산업과 특수선, LNG 등 회사의 현재와 미래를 책임질 기술,·설계, 연구·개발 핵심 전력이다. 이로 인한 조업 차질, 공정 지연에다 기술 유출, 수주 경쟁력 약화 우려도 현실화하고 있다.

삼성중공업은 주력 선종인 고부가 LNG 운반선 생산관리 전문인력 이탈 여파로 올해 건조 목표 달성에 빨간불이 켜졌다. 미래생존 전략사업인 자율운항연구와 친환경제품 개발 역시 차질이 불가피하다.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FLNG(Floating Liquefied Natural Gas, 부유식 액화천연가스 생산·저장·하역 설비)’는 대응 인력 부족으로 신규 수주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

참다못한 조선사들은 작년 8월, 한국조선해양을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했다. 경쟁사 핵심 인력에 대한 부당 유인 행위를 금지한 공정거래법(45조 1항과 시행령 36조 등)을 어겼다는 이유다. 하지만 여태 어떤 조처도, 답도 없다. 공정위가 뒷짐 진 사이 상대는 대놓고 인력 빼가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최근엔 전체 계열사를 대상으로 전 직장 동료를 추천해 최종 입사시키면 100만 원 인센티브를 주는 사내 프로모션까지 진행 중이다.

조선업 활황이 몰고 올 낙수효과를 기대했던 지역사회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상공계 관계자는 “어렵게 반등 기회를 잡은 상황에서 동종사 인재를 빼 가는 무차별적인 경력직 모집은 조선업 생태계를 파괴해 국가기간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나아가 지역 경제마저 피폐해지게 만드는 자살 행위”라며 “정부가 나서서 바로잡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HD현대 측은 이에 대해 “통상적인 공개 채용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부당하게 인력을 빼 온 적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어 “직원 추천은 일반적인 채용 방법의 하나다. 인력 유인 논란이 있을 수 있어 동종사 출신 직원은 제외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면서 “앞으로 새롭고 다양한 방법을 통해 유능한 인재가 회사 문을 두드릴 기회를 넓혀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민진 기자 mjkim@busan.com , 강대한 기자 kd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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