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좋은 부산’ 무색한 산복도로 ‘골병’ 보행권

김준현 기자 joon@busan.com , 양보원 기자 bogiz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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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고 좁은 계단에 이동마저 위험
지자체 정비 예산은 턱없이 부족
상습 고장 모노레일은 철거 수순
행정 구호 걸맞은 환경 마련 시급

22일 오후 부산 동구 범일동 산복도로 인근 마을에서 주민들이 너비가 좁고 단이 높은 계단을 힘겹게 내려오고 있다. 김종진 기자 kjj1761@ 22일 오후 부산 동구 범일동 산복도로 인근 마을에서 주민들이 너비가 좁고 단이 높은 계단을 힘겹게 내려오고 있다. 김종진 기자 kjj1761@

피란 수도였던 부산의 역사성이 담긴 열악한 산복도로의 보행권을 이제는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좁고 가파른 계단길이 산복도로의 정체성이지만, 지나치게 걷기 어려운 길은 장기간 주민의 희생을 요구해 왔고 ‘걷기 좋은 도시 부산’이라는 정책과도 맞지 않아 대안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라는 지적이다.

22일 오후 부산 동구 도시철도 1호선 좌천역에서 멀지 않은 증산로 146개 계단 앞. 아래쪽에서 바라본 계단 위쪽 끝은 까마득하게 높다. 촘촘히 박힌 계단 146개를 다 오르는 데 웬만한 성인도 족히 2~3분 정도는 걸린다. 노약자라면 몇 배는 더 걸릴 정도.

단순히 계단이 많은 것만이 문제는 아니다. 발을 내디딜 수 있는 계단 너비는 30cm가 되지 않는다. 부식돼 떨어져 나간 곳의 너비는 20cm 남짓에 불과했다. 웬만한 성인 여자도 겨우 한 발을 디딜 수 있을 정도에 불과해 자칫하면 발을 헛디디기 십상이다. 이날 때마침 비까지 내렸다. 성인 남성이 한 손으로는 우산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노모를 부축해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이 무척 위태로워 보였다. 이 지역에는 고령자가 많은데, 주민들은 수십 년간 위태로운 길을 인내하며 오른 셈이다.

증산로 146개 계단은 올해 동구청의 계단 정비 사업 대상이다. 하지만 75만 원짜리 소규모 공사여서 일부 파손된 부분을 시멘트로 메우는 수준이다. 더욱이 산복도로 곳곳엔 146개 계단처럼 불편하고 위태로운 길이 퍼져 있지만, 현황 파악조차 제대로 안 된 상태다. 대부분 지자체가 필요한 경우에만 부분적으로 계단 정비를 하는 수준이어서 '걷기 힘든 산복도로'라는 오명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동구청 관계자는 “주민 만족도가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게 계단 정비 사업이지만, 국·시비 지원을 받기 가장 어려운 분야”라며 “우선순위에서 다른 사업에 밀릴 경우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사업을 이어 가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산복도로의 이동권을 확보하기 위한 차원에서 도입했던 모노레일 사업은 실패로 끝났다. 동구청은 현재 초량 168계단에 설치된 모노레일을 철거하고 경사형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모노레일은 2016년 5월 운행을 시작할 당시 지역 주민의 이동을 도우면서 관광 상품으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2020년 4차례, 2021년 6차례, 2022년 4차례 운행이 정지되는 등 자주 고장을 내다 급기야 지난 3월 11일 고장으로 운행이 멈춘 뒤에는 한국교통안전공단으로부터 운행 부적합 판정까지 받아 사실상 철거가 결정된 상황이다. 동구청은 모노레일을 경사형 엘리베이터로 대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현재 산복도로에는 경사형 엘리베이터 2개가 운행 중이다.

전문가들은 산복도로 보행 환경 개선과 이동권 확보에 체계적인 접근을 강조하고 있다. 차량 이동이 제한적인 지역인 만큼 보행 환경 개선은 주민의 삶과 직결된 문제이지만, 자칫 무분별한 정비 사업이 역사성을 간직한 산복도로의 매력을 오히려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부산발전연구원 이원규 박사는 산복도로 이동권 확보와 관련해 “기존 지자체 예산으로는 한계가 분명해 외부 재원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준현 기자 joon@busan.com , 양보원 기자 bogiz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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