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시대의 첨병, 역관
논설위원
조선 선조 때의 역관 홍순언은 “나라를 구했다”는 평을 듣는 ‘외교 첨병’이었다. 그는 사행(使行) 도중 중국에서 한 여인을 구해 준 일이 있었다. 그녀는 훗날 명나라 군권을 거머쥐는 병부상서 석성의 후처가 된다. 이런 인연으로 임진왜란 위기 때 명의 군사적 지원을 끌어낼 수 있었다. 역사의 저울추가 그렇게 바뀌었다. 이에 앞서 명 황조의 사서에 잘못 기재된 조선 왕조의 족보를 바로잡은 이도 홍순언이었다. 이른바 ‘종계변무’라는 외교 문제를 해결한 그는 역관으로서는 파격적인 종2품의 벼슬까지 올랐다.
역관(譯官)이란 통역·번역 업무를 맡은 벼슬아치를 가리킨다. 한국사에서는 고려 충렬왕 2년(1276) 통문관을 설치했다는 〈고려사〉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충렬왕의 아버지 원종이 원나라를 끌어들여 무인정권을 세운 까닭에 몽골어 역관이 필요했던 것이다. 조선도 초창기부터 사역원을 만들어 역관을 양성했다. 조선 시대 4대 외국어는 중국어와 몽골어·일본어·여진어였는데, 10여 년간의 힘든 외국어 훈련 과정을 수료해야 과거시험인 역과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조선 역관의 역할은 단순한 통역에 그치지 않았다. 뛰어난 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세계무대를 종횡무진한 역관들은 국제정세를 직접 체험하고 당대 최고 수준의 신문물과 세계화의 시각을 접했다. ‘외교관’ ‘국제무역상’ ‘정보원’ ‘개화사상가’ 등이 그들의 다른 이름이다. 〈허생전〉에서 허생에게 만 냥을 빌려준 변승업처럼 ‘조선 최대의 갑부’가 되기도 했다. 이들이 양반과 평민 사이의 중인(中人) 신분이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양반 계층과 교감을 나누면서도 신분제 사회의 모순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느꼈으리라는 뜻이다. 중인들이 새로운 시대를 열지는 못했지만 계급사회의 벽을 넘어 실질적으로 조선의 역사를 움직였다고 보는 연구자들도 있다.
부산박물관에서 펼쳐지고 있는 특별기획전 ‘조선의 외교관, 역관’은 그래서 여러모로 눈길을 끈다. 조선 역관의 외교적 역할과 다양한 이야기가 담긴 150여 점의 귀한 유물을 만날 수 있다. 신냉전 질서 앞에서 주변 강국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역학관계가 요동치는 요즘이다. 지금처럼 외교가 흔들리는 때가 없었다. 역관들은 조선을 거점으로 세계를 무대로 삼았고, 조선은 역관을 통해 그 세계를 확장했다. 코스모폴리탄적 실리 외교와 평화를 이끌었던 조선 역관의 지혜를 다시금 일깨워야 할 때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