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간 7번 주인 바뀐 혈투… 불굴의 투지로 지킨 철원평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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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정전 70년 한신협 공동기획] 최후의 전쟁 ‘백마고지 전투’

395고지서 중공군 3개 사단과 사투
유엔군 화력·지휘관 탁월한 운영
12차례 쟁탈전 끝 중부전선 탈환
6·25 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
28만 발 포탄에 하얗게 된 민둥산
말의 형상 닮아 ‘백마고지’라 불려

6·25 전쟁 당시 강원도 철원군 백마고지 전투에서 승리한 국군 장병들이 환호하고 있다. 철원군청 6·25 전쟁 당시 강원도 철원군 백마고지 전투에서 승리한 국군 장병들이 환호하고 있다. 철원군청

1951년 5월 16~22일 강원도 인제군 현리에서 ‘현리전투’가 벌어졌다. 6·25 전쟁 중 국군에게 가장 큰 패배를 안긴 전투다. 9사단을 포함한 국군과 중공군 사이에 벌어진 현리 전투에서 국군은 별다른 교전도 벌이지 못했다. 동부전선이 와해되는 바람에 곧바로 위기를 맞았다.


현리전투에서 중공군에 패한 국군은 이듬해인 1952년 10월 초 철원 서쪽의 395고지(백마고지)에서 또다시 중공군과 맞선다. 이때 395고지는 9사단이 지키고 있었다. 9사단은 1년 전 중공군의 공격에 물러선 부대가 아니었다. 중공군 3개 사단과 치열하게 싸워 시종일관 유리하게 전황을 이끌었고, 결국 395고지에서 중공군을 완전히 몰아냈다.

국군과 유엔군은 백마고지 전투 승리로 군사 요충지를 확보하고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었다. 백마고지 전투 승리는 드넓은 평야를 품은 철원 일대를 남한 땅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휴전회담 그리고 예고된 혈전

유엔군과 공산군은 6·25 전쟁이 시작된 후 1년여 만인 1951년 7월부터 휴전과 포로 교환 등을 위한 회담을 시작한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 없이 시간만 지나갔다. 공산군은 휴전회담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시도했다. 그중 눈에 띈 것은 중공군이 주도한 고지 쟁탈전이었다. 당시 고지 쟁탈전에서는 중공군이 국군과 유엔군이 장악한 고지를 먼저 공격해 차지하면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해 이를 되찾는 형태의 상황을 반복했다. 1952년 가을 포로 문제를 둘러싼 유엔군과 공산군의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을 때 한반도 중앙의 최고 요충지 ‘철의 삼각지대’로 관심이 집중됐다. 9사단이 주둔한 395고지였다. 철원평야와 평강고원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한반도 중부의 심장부인 이곳에서의 치열한 전투는 피할 수 없었다.

백마고지 전적지 정상에서 바라본 백마고지. 디지털철원문화대전 제공 백마고지 전적지 정상에서 바라본 백마고지. 디지털철원문화대전 제공

■철의 삼각지대

철원과 김화, 평강을 잇는 지리적 삼각지대를 ‘철의 삼각지대’라고 부른다. 이 지역은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과 역시 원산으로 향하는 국도 5호선이 지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지리적, 군사적으로 서로 절대 빼앗길 수 없는 중부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요충지였다. 철의 삼각지대를 확보하지 않고 중부전선 전체를 장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는 6·25 전쟁 중 최대 혈전이 벌어지게 된 이유가 된다.

철의 삼각지대에서 평강으로 향할수록 지형이 높아져 수비를 하는 국군과 유엔군 입장에서는 불리한 조건이었다. 공세에 나선 북한군과 중공군에 유리한 지형이었다. 중공군은 유리한 지형과 우세한 병력을 앞세워 군사·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철원 일대를 확보하기 위해 395고지를 노리고 대규모 공세를 감행했다. 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395고지를 비롯한 철원평야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9사단은 395고지 일대에 주둔해 중국군 3개 사단에 맞섰다.


국군과 중공군 사이의 치열했던 백마고지 전투 장면. 디지털철원문화대전 제공 국군과 중공군 사이의 치열했던 백마고지 전투 장면. 디지털철원문화대전 제공

■열흘간의 격전

1952년 10월 6일 새벽, 395고지 주봉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9사단과 중공군은 6~9일 주로 포격전을 벌였다. 중공군은 유엔군에 비해 열세였던 포병 화력을 대대적으로 증강한 상태였다. 물론 유엔군에 비해서는 무기와 장비 등에서 열세였지만, 중공군의 화력 보강은 국군과 유엔군에게는 분명 부담으로 다가왔다.

미군은 9사단이 지키던 395고지 사수를 위해 항공기를 투입, 중공군 포병부대에 대대적인 폭격을 실시했다. 인근 국군과 미군의 포병부대도 중공군을 향해 포탄을 퍼부었다. 중공군도 9사단이 사수하던 395고지 정상에 집중적으로 포격을 가했다. 한편으로는 국군의 증원과 군수 지원 등을 방해하기 위해 395고지 북쪽에 위치한 봉래호의 수문을 폭파해 국군의 후방에 있는 역곡천을 범람시켰다.

7~11일에는 9사단과 중공군 사이의 직접적인 전투, 즉 고지 쟁탈전이 치열하게 벌어진다. 화력에서 열세였던 중공군은 야간에 공격을 감행해 9사단이 방어한 395고지를 점령했다. 밀려난 9사단은 신속하게 예비대를 동원해서 반격에 나서 고지를 재탈환하기를 반복했다. 395고지에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투가 벌어졌다. 총성과 포격이 멈춘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을 만큼 치열한 공방이 계속됐다. 당시 9사단장 김종오 장군과 주요 지휘관들은 395고지 쟁탈전에서 적절한 시기에 강력한 예비대를 투입하는 등 효율적인 부대 운영으로 작전을 펼쳐 전체적으로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갔다. 395고지에서는 12차례 고지 쟁탈전이 벌어졌고 7번이나 고지 주봉의 주인이 바뀌는 혈투가 벌어졌다.

11~12일 이틀 동안은 395고지 주봉을 차지한 9사단의 방어전이 진행됐다. 9사단의 계속된 방어에 중공군은 많은 병력을 잃었고 화력에서도 열세를 드러냈다. 9사단은 마침내 395고지 북쪽 낙타능선상의 전초진지를 탈환해 중공군을 완벽하게 몰아내고 백마고지 전투의 신화를 만들었다.


전투에서 희생된 우리 장병들을 기리는 백마고지 충혼비. 김대호 강원일보 기자 전투에서 희생된 우리 장병들을 기리는 백마고지 충혼비. 김대호 강원일보 기자

■전투 승리와 큰 피해

9사단은 1951년 8월부터 8주 동안 국군 사단 중 처음으로 미군 제1군단이 주관한 FTC(Field Training Center)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이를 통해 지휘관의 부대 지휘 역량이 크게 강화됐고, 전투원의 전투 수행 능력도 높아졌다. 또 사단 자체 교육훈련도 꾸준히 진행했다. 백마고지 전투 승리는 유엔군의 막강한 화력 지원과 함께 9사단 지휘관들의 신속한 예비부대 투입 등 탁월한 지휘, 전투원들의 전투 수행능력 등이 맞물려 중공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한 끝에 쟁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백마고지를 지켜야 한다는 부대원들의 불굴의 투지가 한몫한 결과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열흘 동안 이어진 395고지 전투에서 포탄을 무려 22만여 발이나 발사했다. 중공군도 포탄 5만 5000여 발을 395고지에 퍼붓는 등 양측 합쳐 포탄 총 28만여 발이 사용됐다. 유엔군은 9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항공기를 750여 차례 출격시키는 등 395고지 사수에 집중했다. 치열한 백병전과 함께 포탄 수십만 발이 395고지를 타격하는 바람에 고지의 수목은 모두 사라졌다. 하얗게 변한 민둥산의 모습은 흡사 하얀 말이 누운 것처럼 보였다. 국군은 이때부터 395고지를 ‘백마고지’로, 9사단은 ‘백마부대’로 부르게 됐다. 9사단은 당시 전투에서 사상자 3500여 명을 낸 반면, 중공군은 무려 1만 4000여 명 사상자를 기록했다. 백마고지 전투 여파로 중공군 제38군 예하 3개 사단이 와해됐다.


강원도 철원군 백마고지 전적지 광장에 선 백마상. 강원도 철원군 백마고지 전적지 광장에 선 백마상.

■기억해야 할 전투

휴전선 남쪽, 철원읍 산명리에는 백마고지 전투를 기리는 백마고지 전적지가 조성돼 있다. 전투 승리를 기념하는 전적비와 충혼비, 위령비, 백마고지 전투 현황 등이 기록된 기념관, 대형 태극기 게양대 등이 설치돼 있다. 전적지 서쪽으로 백마고지와 함께 드넓은 철원평야를 조망할 수 있다. 백마고지 전적지를 찾은 관광객과 모내기에 나선 농부, 불과 수km 거리에 있는 DMZ 초소의 모습이 교차돼 평화는 아직 멀게만 느껴진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395고지에서 적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이름 없는 군인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잊지 말아야 할 이유다.

김대호 강원일보 기자 mantough@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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