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은의 문화 캔버스] 얼룩말 ‘세로’와 자동차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장
생명체의 역동적 아름다움에 새삼 매혹
예술의 고전적 주제, 미래주의 운동과 결합
기계와 유기체의 또 다른 변주로 나아가
지난 3월 서울 어린이대공원에서 사육되던 얼룩말 ‘세로’가 차도와 골목길을 뛰어다니다 포획되어 사육장으로 돌아간 사건이 있었다. 도심 한복판, 의외의 장소에 나타난 얼룩말의 모습은 그 자체로 매우 인상적이고 매혹적이었다. 많은 사람이 세로가 탈출한 사연에 관심을 갖기도 하고, 세로가 나오는 영상을 공유하고 재미있는 합성사진들을 만들기도 하며 즐거워했다. 도로에서 자동차들과 확연히 대비되는 얼룩말의 유연하고 역동적인 움직임, 인공적인 무기물인 자동차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유기체가 갖는 생동감은 보는 사람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부모 잃은 외로움에 우리를 부수고 탈출했다는 이야기까지 더해지면서 사람들은 얼룩말 세로를 응원하기도 하고, 동물을 가둬 사육하고 볼거리로 전시하는 방식에 대해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아무튼 세로는 탈출 소동으로 어린이대공원의 매력 스타로 떠올랐다.
필자 역시 TV에서 그 장면을 보고 자유로운 생명력을 내뿜는 얼룩말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자동차와 얼룩말, 둘 다 달리는 재주가 있고, 사람이 탈 수도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얼룩말의 움직이는 근육, 미세한 표정, 유연함에는 무기물인 자동차가 흉내 낼 수 없는 유기체만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세로가 등장한 뉴스의 한 장면에서 순간 우리를 매혹시킨 것은 바로 그러한 생명력과 아름다움일 것이다.
살아 있는 존재의 미, 그것은 고대 그리스 시기로부터 미술의 가장 중요한 주제였다.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는 인간 몸의 아름다움이었다. 이상적 비례, 조화, 균형을 갖춘 완벽한 인체 조각을 제작하는 규범과 전통은 고대 그리스에서 확립되었고,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기까지 조각과 회화에 영향을 주었다. 물론 현재까지도 인체를 비롯한 살아 있는 유기체는 여전히 미술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자 모티프이다.
한편 20세기 들어 눈부신 과학 발전에 힘입어 자동차·기차·비행기 같은 운송 수단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기계화된 공장제 산업사회로의 변동이 이뤄지던 역사적 시기였다. 인류는 과학 문명에 대한 낙관적 기대 속에 기계의 합리적 구조와 형식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자 했다. 이를 미적 규범으로 삼는 ‘기계 미학’과 기하학적이고 정형화된 이미지에 영향받은 미술, 디자인, 건축 등이 나타났다. 이 영향으로 등장한 미래주의, 러시아 구성주의, 키네틱아트 등은 기계문명을 찬양하고 기계가 지닌 형식미, 역동성, 기능성에 주목했다.
특히 20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발달한 미래주의는 전통적 미의식을 전복시키고자 했던 매우 과격한 미술운동으로 속도감, 빛의 효과, 동적인 추진력을 통해 과학과 기계문명의 미를 표현하고자 했다. 아마도 고대 그리스·로마에서부터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로 이어지는 이탈리아의 방대한 고전 문화의 전통에 대해 이탈리아의 젊은 작가들은 경의와 함께, 중압감과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다. 시대가 달라짐에 따라 과거의 전통과 유산을 넘어서야 했지만 너무도 위대했던 전통을 전복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미래주의는 1909년 이탈리아 시인 마리네티가 미래주의 선언문을 발표하면서 문학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는 예술가들에게 “용감하고 대범하며 반항적인” 면을 보여 줄 것을 호소했다. 미래주의자들은 전통이라는 것은 낡고 구식이어서 완전히 무너뜨려야 한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전통을 가지고는 현대의 특성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지식의 오랜 보고인 박물관과 도서관 등을 부수어 버려야 한다고 했다. 특히 마리네티는 “새로운 시대의 미는 속도의 미”라고 강조하면서 “힘차게 달리는 유선형의 경주용 자동차는 고전 조각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상’보다 아름답다”고 선언했다. 미래주의 미술의 핵심은 움직임의 표현이었으며 보초니, 자코모 발라, 카를로 카라 등 미래주의자들은 연기를 내뿜는 기관차, 전기를 상징하는 빛, 활기찬 도시의 새벽 건축공사 현장 등을 작품에 담아 냈다.
이제 미술 작품에 기계가 등장하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고, 작품 속에서 기계와 유기체의 변주와 교차는 더욱 복합적이고 확장된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지금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에서는 자동차 부품으로 만들어진 말(馬)이 전시되고 있다. 버려져 폐기물이 된 자동차 부품들로 만든 민성진 건축가의 작품인데, 작가는 이 작업으로 업무 스트레스를 풀곤 한다고. 재능 있는 예술가들은 스트레스 해소 방법도 남다르다. 폐기물, 게다가 자동차 부품으로 만든 작품이라기엔 참 멋지고 아름답다.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연결된 부품들 하나하나를 찬찬히 따라가며 말의 몸뚱이 전체를 눈으로 음미하게 된다. 이제 예술 작품 속에서 말과 자동차는 하나가 되었다. 이 작품 위로 자동차 사이를 뛰어다니던 세로의 모습이 오버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