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노동과 쉼을 선택할 수 있는 노년, 불가능한 일일까
윤여진 사회부 차장
사건사고가 휘몰아치는 와중에 눈길이 닿은 기사가 있었다. 지난 3일 한국고용정보원 주최로 열린 고용패널조사 학술대회에서 공개된 논문에 대한 내용이었다.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우리나라 68세 근로자 월평균 근로소득은 180만 원으로, 58세(311만 원)보다 42%나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막연하게 짐작만 하던 미래를 환산된 수치로 마주하니 ‘현타’(실제 상황을 깨닫는 시간)오기 충분했다.
지난해 연수차 미국에 머물면서 마주했던 일상이 불현듯 떠올랐다. 생활 반경 안에서 만났던 상당수가 자신의 업무에 긍지를 가지고 있던 현역 어르신들이었다. 집 근처 YMCA 센터에서 등록을 적극 권하던 이도 카운터에서 안내를 도맡던 어르신이었다. 여러 통의 전화 후 월회비를 40% 가까이나 줄일 수 있는 방법까지 찾아줬다. 코스트코와 스타벅스뿐만 아니라 우체국, 학교, 도서관 등 지역 곳곳에서 낯선 이방인에게 손길을 내밀어주는 사람도 어르신들이었다. 특유의 스몰토크로 고객의 마음을 보듬는 그들에게서 삶의 여유가 전해졌다.
답사나 여행지에서 만난 어르신들도 허물 없이 다가왔다. 뉴올리언스에서 만난 노부부는 “30년 일했으면 30년 놀 권리가 있다”며 15년 째 여행 중이라고 했다. 이들에게 한국에선 원치 않는 은퇴를 하고, 나이 들어서도 일해야 한다고 했더니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그럼 한국 사람들은 언제부터 은퇴 이후 삶을 즐기나요?”
우리나라에서 은퇴를 계획하고 일을 관두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부족한 연금, 불안한 고용, 과도한 주택 대출, 자녀 교육으로 인한 목돈 지출…. 중장년을 겨우 버텨내고 맞는 삶은 대개 ‘가난한 노년’이다. 실제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은 2020년 기준 40.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1위다. 이는 자연스럽게 높은 고용률로 이어지지만, 대개 퇴직 후 경력을 살릴 기회조차 없이 임시·일용직을 전전한다. 정년 이후 연금 수령을 하는 65세까지 5년여 간 이른바 ‘노년 보릿고개’를 견뎌내야 하는 젊은 노인 ‘신중년’들의 사정은 더욱 딱하다. ‘살아내기’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구조에서 여유는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노동과 쉼을 선택할 수 있는 노년의 삶을 꿈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노년 인구는 늘 것이고 곧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연금 개혁과 공적연금 확대 등 보다 탄탄한 사회안전망 구축을 위해 다양한 연령층의 합의를 적극 이끌어내야 한다. 부산은 2021년 전국 특·광역시 중 처음으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만큼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민관 협력에 적극 앞장서야 한다. 신중년이 가진 노하우를 지역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장을 열어야 한다. 시니어 전문회사 등으로 노년 일자리는 물론 노년을 위한 경제를 활성화한 일본, 노인법을 도입해 지원에 나선 미국의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무엇보다도 고립되지 않고 다양한 세대와 관계를 만들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의 일터에서 만난 어르신들이 한결같이 한 말은 “함께 일할 수 있어 좋다”였다. 여전히 사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공유하는 것, 어쩌면 가장 중요한 가치일지 모른다. 가난한 노년이 특정 세대의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되는 순간,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윤여진 기자 onlypen@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