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비한 학살… 민간인, 이념 충돌의 희생양 되다
[한국전쟁 정전 70년 한신협 공동기획] 전주·군산형무소 재소자 집단학살
좌·우익 분쟁에 민간인 대거 희생
7사단 군인, 전주 재소자들 학살
69년 만에 황방산 유해 발굴 시작
유해 44개체 찾아 추모의 집 안치
지방좌익에 의해 ‘반동분자’ 규정
‘우익인사’도 1000여 명 희생 추정
군산형무소서도 좌익사범 학살 증언
학살지 군산비행장, 미군부대 사용
현재 발굴 시도조차 힘든 상황
“6·25 때 내가 열여섯~열일곱 살이었는데, 밤에 금상동 마을 주민들을 동원해서 구덩이를 팠어. 구덩이를 판 자리가 구세군 교회(소리개재·전북 전주시 동부 지역) 뒤편이야. 밤에 횃불을 붙이고 했지.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죽였는데, 그다음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어….” 백 모(88·전주시 덕진구 산정동) 씨는 ‘전주지역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 조사’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박 모(88·전주시 완산구 효자동) 씨도 “한국전쟁 당시 전주경찰서에 수감돼 있던 작은아버지가 어딘가로 끌려가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와 누이가 시신을 찾기 위해 효자동 황방산 일대를 돌아다녔다”면서 “그 이후 황방산 일대로 소풍을 가면 고구마 두둑 형태를 이룬 지형이 많았는데, 유해를 매장했던 곳으로 추정된다”고 조사단에 밝혔다.
이처럼 6·25 전쟁이 발발하자 한강 이남 형무소에서는 대규모 수용자 학살 사건이 벌어졌다. 비교적 후방으로 평가를 받는 호남에도 그 아픔은 존재한다. 그리고 정전 70년을 맞이하지만, 상흔은 여전히 치유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이념 충돌의 희생양은 바로 민간인이었다. 전북에서는 군경에 의해 당시 형무소에 수용됐던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 대표적인 곳은 바로 전주형무소와 군산형무소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10년 조사보고서에서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께 전주형무소 재소자들이 7사단 3연대 군인들에 의해 학살당했다고 밝혔다.
희생 규모를 추정할 수는 없지만 희생자 70여 명의 신원을 확인했다. 이들이 끌려가 학살당한 장소는 당시 진북동에 있던 전주형무소(현재 평화동으로 이전)에서 약 6km 떨어진 황방산이다. 전주형무소 재소자 중에는 여순사건 관련자도 많았다고 한다. 피해 가족들은 전주형무소에는 민간인이 많이 수감됐다고 증언했다.
이념 차이로 우익인사가 희생되기도 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보고서에서 '1950년 9월 26~27일 양일에 전주형무소에서 인민군 102경비연대, 전주형무소장 이하 간수, 내무서원, 지방좌익에 의해 ‘반동분자’로 규정된 우익인사 1000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3차에 걸친 유해 발굴, 44개체 확인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한 해 앞둔 2019년 전주시, 전주대 박물관 주도로 전주 지역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이 시작됐다. 그 결과 희생자 44개체(치아 기준)가 발굴돼 안치됐다.
먼저 효자동 황방산과 산정동 소리개재에서 사전 조사가 진행됐다. 두 지역의 시굴조사 결과 효자동 황방산(효자동 3가 산 195-1번지)에서 유해 매장 추정지가 확인돼 발굴조사로 전환됐다. 산정동 소리개재에서는 2차례 조사가 이뤄졌지만 현재까지 유해 매장 추정지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다. 현재 황방산 일대 위주로 3차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황방산 유해 매장지는 3열의 구덩이 형태로 확인됐다. 구덩이는 모두 남북 방향이다. 등고선과 나란하게 조성돼 있고, 기다란 구덩이를 파서 학살한 사람을 매장한 것으로 판단된다는 것이 조사단의 설명이었다.
조사단은 '전주지역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 조사 보고서'에서 “이러한 것은 전쟁 전후에 계획적으로 학살을 진행했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학살의 주체는 탄약류에 의해서 구분이 가능하다. 탄약류로는 카빈소총 탄피, M1소총 탄피, 탄두 및 철제편 등이 출토됐다. 이러한 출토품은 그 당시 군인 혹은 경찰이 착용했던 무기 체계와 일치한다. 무기 체계의 일치는 학살이 당시 군인과 경찰 등 정부에 의해 자행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이 조사단의 설명이었다. 치아 마모도를 볼 때 당시 희생자들은 29~35세 정도로 추정된다고도 했다.
전주시와 전주대는 1년이 넘은 발굴 조사를 벌인 끝에 2021년 5월 18일 “군경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전주 지역 민간인의 유해와 유품이 발굴됐다”며 “유해 44개체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특히 유품을 보존처리한 결과 탄피에 인골편이 흡착된 것으로 나타나 당시 민간인이 잔인하게 희생됐음을 엿보게 했다고도 덧붙였다.
보고서는 '전주 지역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을 통해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깊은 애도를 전한다. 조사, 보고서 작성 등 모든 과정에서도 마음 깊이 희생자가 영면하길 기원한다'고 밝힌 뒤 '향후 지속적인 유해 발굴 및 추모사업에 대한 관심과 예산 지원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의 영면과 유가족 위로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주대 박물관 박현수 학예연구실장은 “유해 출토 양상은 이전 조사와 유사하다. 대퇴골, 두개골, 상완골 순으로 수습됐다. 전반적으로 유실된 부위가 많고 잔존 부위 보존 상태도 열악해 절반 이상의 유해가 부위 판별조차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전주시는 2020년 7월 1차 유해발굴 조사에서 나온 두개골과 치아, 다리뼈 일부 등 유해 34개체와 M1소총, 권총 탄피, 벨트 등 129건을, 2021년 2차에서 추가 발굴한 유해 10개체와 유품 84점을 세종시 추모의 집에 안치했다.
전주시는 이어 지난 4월 13일 다시 황방산 일대에서 발굴 작업을 위한 개토제를 열었다. 작업은 오는 7월까지 이어지며, 발굴된 유해는 감식 작업을 거친 뒤 세종추모의 집에 안치될 예정이다.
전주시 관계자는 “아픈 과거사를 정리하고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노력의 하나”라며 “유해 발굴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겠다”고 말했다.
■희생자 추모하는 전시회도 개최
전주대 박물관은 2020년 10~11월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사)한국대학박물관협회 주관으로 한국전쟁 70주년 특별전 ‘70년의 기억, 그리고 전쟁이 남긴 아픔 그리고 화해’라는 주제의 전시회를 가졌다. 2020년 대학박물관 진흥지원 사업의 지원을 받았다.
당시 전시는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기억 속에서 잊혀 가는 전쟁의 참혹한 현실과 슬픔을 어루만지고, 좌우의 대립이 아닌 과거에 대한 반성과 화해의 방법을 제시하려고 기획됐다. 전시에서는 2019년부터 발굴된 민간인 희생자의 유품을 볼 수 있었다. 당시 발견된 허리벨트, 고무줄, 단추 등 사회상을 반영하는 각종 유품을 최초로 소개해 관람객의 공감을 이끌었다.
전시 유품인 허리벨트에 올림픽 오륜기와 복싱, 그리고 영문으로 ‘KOREA’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엑스레이 촬영으로 확인했다. 유품과 관련된 민간인 희생자가 누구였는지 깊은 관심을 유발할 수밖에 없었다. 이외에도 ‘춘’ 또는 ‘大工’으로 추정되는 글씨가 새겨진 허리벨트 1점도 관람객의 큰 관심을 받았다.
■귀향 못 한 군산형무소 희생자
군산시의 사정은 유해 발굴과 안치까지 이뤄지고 전시회까지 개최된 전주시와 확연히 다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보고서를 보면 군산형무소에는 전쟁 당시 900~1000여 명이 수용돼 있었다. 전쟁 직후 일반 수용자는 석방하고, 중형을 받은 수형자는 다른 형무소로 이송하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좌익사범 처리 결과는 기록되지 않았다.
간수들의 증언에 따르면 좌익사범은 군산비행장에서 헌병과 경찰에 의해 학살당했다고 한다. 진실화해위원회는 피학살자 유족의 진상 규명 건의 중에서 9건을 확인했다. 현재 군산비행장은 미군 38전투비행단이 사용하고 있어 발굴 시도조차 힘든 상황이다. 〈한국 교정사〉에 따르면 군산형무소는 군산시 금광동에 있었다. 1950년 7월 16일 일반 수형자는 일시 석방되고 중범 수형자는 광주형무소로 이송됐다가 다시 대구형무소로 이송됐다.
〈한국 교정사〉에는 한국전쟁 발발 후 소위 좌익사범을 어떻게 했는지 기록돼 있지 않다. 다만 전쟁 수복 때부터 군산형무소에서 근무했던 간수 진술에는 “10년 이상 징역형, 무기형, 사형을 선고받은 좌익사범은 군산비행장에서 헌병과 경찰에 의해 처형됐다”는 내용이 있었다. 상당수가 여순사건 발생 후 검거돼 군산형무소에 수감된 이들이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백세종 전북일보 기자 103bell@jj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