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평야 황금들녘을 한 잔에…‘전통주 세계화’ 도전하는 가야양조장 [술도락 맛홀릭] <12>
[술도락 맛홀릭] <12> 가야양조장 '가야막걸리'
가가호호 술을 빚던 시절이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졌던 가양주(家釀酒) 문화가 100년 만에 다시 부활하고 있다. 현재까지 발급된 지역특산주 면허만 1400건에 이르고, 해마다 새로운 양조장과 전통주가 탄생한다.
전통주엔 지역의 특색이 오롯이 담겼다. 지역에서 나는 재료로 술을 빚어, 특산음식과도 잘 어울린다. <부산일보>는 ‘술도락 맛홀릭’ 기획시리즈를 통해 부산·울산·경남 지역의 전통주 양조장을 탐방하고, 지역의 맛과 가치를 재조명한다. 이지민 대동여주도 대표 등 전통주 전문가도 힘을 보탠다.
김해평야의 황금들녘으로 술을 만든다면 어떤 맛일까. 김해평야의 햅쌀로 전통주를 빚는 양조장이 있다. 외국 술만 다루다 우리 술로 ‘전향’한 양조장 대표의 이력도 흥미롭다. 금관가야의 고장 김해에서 ‘전통주 세계화’에 앞장서겠다는 양조인을 만났다.
■ 외국 술 끊고, 우리 술에 빠지다
경남 김해시 한림면, 부산외곽순환고속도로 한림IC에서 빠져나와 몇몇 공장을 지나자 막다른 골목이 나타난다. 골목 끝 야산 중턱에 자리한 건물. 궂은 날씨에도 ‘가야양조장’ 다섯 글자가 황금빛으로 빛난다. 설립 3년이 채 안 된 신생양조장이지만 그동안 막걸리와 리큐르·증류주(소주)까지, 모두 7종의 술을 세상에 내놨다.
“주변에선 너무 빨리 여러 술을 출시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어요. 하지만 양조장을 시작할 때부터 어떤 술을 언제 내놓겠다는 계획이 서 있었습니다.”
가야양조장 조이덕(52) 대표의 자신감엔 이유가 있다. 양조장을 차리기까지 10년 가까이 준비 기간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의 노트엔 여러 술에 대한 연구 결과와 출시 계획까지 빼곡히 적혀 있다.
조 대표는 외국 술 전문가였다. 잭다니엘로 유명한 외국계 주류회사에서 15년 동안 일했다. 오랫동안 마케팅을 담당하면서, 다른 나라의 경쟁사 술까지 빠짐없이 꿸 정도가 됐다. 그러다 마흔 즈음, 우연히 우리나라 전통주를 접하면서 ‘술 인생’이 달라졌다.
“우리나라 술도 제대로 모르면서 남의 나라 술을 열심히 팔았던 거죠. 옛날 방식 그대로 빚은 전통주의 맛에 매료되면서, 일단 우리 술을 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조 대표는 업무 틈틈이 독학으로 누룩과 발효 등 전통주에 대해 공부했다. 직업상 술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었기에, 위스키·와인·맥주 등 세계의 다양한 술과 비교하며 이내 우리 술의 우수성을 알게 됐다. 술 빚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전국을 수소문해, 전통주 고수들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2015년 회사를 그만 둔 뒤에는 고향 김해지역에서 주류도매업체를 운영했다. 국산 술의 유통 과정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5년이 더 흘렀고, 발효부터 술 빚기·유통까지 전통주의 전 과정을 섭렵한 뒤 비로소 양조장을 차렸다.
조 대표는 양조장의 근거지로 고향 김해를 고집했다. 맑은 물과 비옥한 토양이 있는 김해평야의 황금들녘이라면 좋은 술을 빚을 수 있겠단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공업지역이 많은 김해시의 특성상 양조장 허가를 받을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었다. 반 년 넘게 김해지역을 이 잡듯이 뒤진 끝에 지금의 자리에 터를 잡았다.
“부지를 찾느라 집사람이 고생을 엄청 많이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본 장소가 여긴데, 이곳마저 허가가 안 나면 포기하려고 했죠.”
■ 원재료의 풍미를 살린 ‘어머니의 맛’
설립까지 진통이 있었지만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첫 작품이자 대표 술인 ‘가야 프리미엄 막걸리’(가야막걸리)는 2020년 7월 농업회사법인을 설립하고 반 년이 채 안 된 12월 1일 첫선을 보였다. 먼 친척이자 동래아들 막걸리로 유명한 부산 기다림양조장 조태영 대표의 도움이 컸다.
“양조장 공사를 하면서 설비를 갖추는 동안 기다림양조장에서 조태영 대표와 함께 시제품을 만들었습니다. 거기서 완성된 레시피를 가져와 바로 술을 빚었기 때문에 빨리 출시할 수 있었어요.”
두 대표는 첨가물 없이 전통 방식 그대로 술을 빚어야 한다는 데 뜻이 일치했다. 원칙대로 가야막걸리엔 물과 쌀, 누룩과 효모만 들어간다. 쌀은 김해평야의 황금빛 기운을 듬뿍 받은 김해산이다. 특히 겨울부터 봄까지는 고향 가동마을 들녘에서 조 대표의 부모님이 직접 재배한 자경쌀을 쓴다.
가야막걸리는 20대를 겨냥해 개발한 술이다.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단맛과 단향이 기본을 이룬다. 쌀가루를 분쇄해 밑술을 만들고, 고두밥으로 덧술을 한 이양주다. 발효 5일, 일반 숙성 25일, 저온 숙성 3일 등 술 빚기를 시작해 시중에 판매되기까지 33일이 걸린다. 초창기 전국의 롯데마트에 납품하며 한때 월 1만 5000병가량 판매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20대에 초점을 맞췄는데 의외로 어르신들이 더 좋아하세요. 옛날 막걸리처럼 걸쭉해서 ‘어머니의 맛’ 같다며 알아주시더라고요.”
두 달 뒤엔 어머니의 맛에 더 가까운 두 번째 작품 ‘님그리다’를 선보였다. 멥쌀과 찹쌀의 비율이 4 대 6으로, 가야막걸리와 반대다. 누룩을 다르게 쓰고, 숙성 기간도 배로 늘려 술 빚는 기간도 66일이나 된다. 가야막걸리보다 더 걸쭉하고 산미도 있어, 옛날 어머니가 빚으시던 막걸리에 더 가깝다는 게 조 대표의 설명이다.
뒤이어 지난해 7월엔 해외 수출용 리큐르 ‘블루문’을 출시했고, 지난달엔 증류주(소주) 3종을 선보였다.
특히 소주는 김해지역 농가에 도움이 되도록 지역농산물을 첨가해 맛을 완성했다. ‘가야25’(25도)는 장군차, ‘가야금주’(23도)는 유기농 생강, ‘탱자C’(23도)엔 야생 탱자가 들어간다.
소주 뚜껑을 열어 코를 가까이하니 재료의 향이 물씬 피어오른다. 술의 향을 중시하는 조 대표가 독자 개발한 증류방식 덕분이다. 우리나라의 전통 상압식에다 외국 술의 감압식을 혼합한 증류기로 재료의 향을 과하지 않게 살렸다.
■ 김해뒷고기와 가야의 술이 만나면…
가야양조장의 술은 우리나라 전통음식과 두루 잘 어울린다. 특히, 김해지역 대표음식인 뒷고기와 훌륭한 마리아주를 이룬다. 김해뒷고기는 부산에서도 만날 수 있지만 원조를 맛보려면 김해로 가야 한다.
김해시 부원동 부산김해경전철 부원역 인근 시가지에는 뒷고기 상호를 단 식당만 10여 곳이 성업 중이다. 그중 20년 역사의 ‘불야성뒷고기’의 뒷고기는 암퇘지 앞다리살만 사용해 잡내가 없고 깔끔하다. 가마솥을 만드는 주물로 특수제작한 불판과 숯불은 고기를 바삭하게 잘 익혀 준다. 주인장이 직접 담근 묵은지와 함께 한 점 먹으니, 간도 적절하고 고소함은 배가된다. 여기에 가야막걸리를 곁들이면 ‘삼겹살+소주’ 부럽지 않은 궁합이다.
특히 불야성뒷고기는 손수 재배한 작물로 찬을 만든다. 김치를 비롯해 마늘·양파 장아찌, 마늘과 쌈채소 등 거의 모든 찬이 주인장의 밭에서 나왔다. 직접 쑨 메주로 끓이는 된장찌개도 지나칠 수 없는 메뉴다.
가야양조장의 술은 김해 삼계동 일부 가게와 유명식당에서 만날 수 있다. 축협하나로마트 등 중소형 마트와 온라인 매장에서도 구매가 가능하다.
조 대표는 앞으로도 다양한 술을 출시할 계획이다. 먼저 해병대전우회와 협업한 매실 증류주를 올여름 선보인다. 지역의 산딸기와 딸기를 활용한 ‘브랜디’, 알코올 도수를 높인 프리미엄 막걸리도 개발 중이다. 모두 수출을 염두에 둔 술들이다.
“국내에서 좋은 경쟁을 하는 것도 의미 있지만, 결국 수출이 돼야 진정한 전통주의 발전이라고 생각해요. 전통주 세계화의 선봉장이 되고 싶습니다.”
조 대표의 포부를 듣고 다시 보니 가야양조장 로고부터 예사롭지 않다. 금관가야의 술잔을 중심으로 황금빛 벼 이삭이 둥그렇게 감싼 형상이다. 그 옛날 금관가야가 활발한 해상무역으로 번영했듯, 가야양조장의 술이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가는 그림이 그려진다.
글·사진=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제품명 : 가야 프리미엄 막걸리
-양조장 : 가야양조장(경남 김해시)
-내용량 : 750mL
-알코올 : 6.0%
-원재료 : 정제수·쌀·누룩·효모
[기자들의 시음평]
▶남형욱 디지털미디어부 기자
“가볍고 깔끔해 음료수처럼 마실 수 있다. 3주쯤 지난 술은 산미가 더 올라와 상큼한 느낌.”
▶이상배 디지털미디어부 기자
“흙 내음과 꽃향기가 나는데, 뒷맛에서 그 향이 이어져 독특하다. 상큼하게 마실 수 있을 듯.”
▶이지민 디지털미디어부 에디터
“가벼운 단맛에 고소함도 살짝 느껴진다. 3주 된 술은 향이 더 강하게 올라와 입맛에 더 맞다.”
▶권채연 디지털미디어부 인턴
“탄산이 없는 편이라 먹고 나서 속에 더부룩함이 없다. 가볍게 견과류와 곁들이면 좋을 듯.”
[전문가의 맛 코멘트]
▶이지민 대동여주도 대표
“차분한 베이지 컬러에 곡물과 미세한 누룩 입자들이 보여 적당한 밀도감을 보여 준다. 부드럽고 순한 곡향이 피어오르며, 요구르트 같은 유제품·참외 향 등이 느껴진다. 온도가 올라갈수록 고소한 향도 조금씩 더 나타난다. 향의 속성이 맛에도 담겼는데, 담백한 가운데 적당한 산미가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부드럽고 밀키(milky)한 질감이 혀에서 느껴지며 후미에서 산미의 여운을 남기는데, 쓴맛이나 알코올감 없이 은은하게 마무리된다. 이 관능평은 제품 수령 직후 바로 맛보고 쓴 것이다. 라벨에 표기된 설명처럼 냉장고에서 숙성하는 동안 맛의 캐릭터가 조금씩 바뀌므로, 주 단위로 맛을 느껴 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가 될 수 있겠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