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역사·개발 열기 묵묵히…아름답고도 가련한 ‘가덕도’
외양포 포진지와 대항항·새바지항 인공 동굴
섬 곳곳 일본군 군사 시설 그대로 남아 있어
연대봉 오르면 가덕도 천혜의 절경 한눈에
신공항 건설 앞두고 보존과 개발 갈등도…
부산의 최남단. 면적(20.96㎢)으로 따지면 서울 여의도(8.4㎢)보다 배 이상, 영도(14.1㎢)보다는 1.6배 넓은 부산 최대 섬. 부산 가덕도다. 도선을 이용해야만 오갈 수 있었던 이 섬은 2010년 연륙교 개통으로 차로 오갈 수 있는 곳이 되면서 ‘뭍의 시대’를 열었다. 2011년에는 거가대교가 개통하면서 접근성이 더욱 좋아졌다. 존재 자체가 낯설었던 가덕도가 부산 시민들은 물론, 전국적으로 많이 알려지게 된 계기가 있다. 가덕신공항 건설사업이다. 가덕도로 떠났다. 개발의 바람에서 비켜나 있던 가덕도는 여전히 아름다운 자연을 온전히 품고 있다. 신공항 건설을 앞두고 개발과 보존 사이 방황하는 모습도 역력하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가덕도 내 곳곳에 자리한 가슴 아픈 일제 침략의 역사 현장도 마주하며 ‘다크 헤리티지(Dark Heritage·부정적 문화유산)’의 보존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어 더욱 뜻깊다.
■일제 침략 역사 흔적과 마주하다
위아래로 길쭉한 섬인 가덕도를 여행하는 방법은 위에서부터 내려가며 둘러보거나, 반대로 아래에서 올라가며 훑는 방법이 있다. 꼭 찾아봐야 할 명소와 역사의 흔적이 섬 남쪽에 많이 분포하고 있는 만큼 후자를 택했다. 가덕도 여행은 일제강점기 역사 탐방이 주를 이룬다. 일제는 뭍으로 향할 수 있는 진해만과 대한해협 사이에 자리한 가덕도의 지정학적 이점을 살려 침략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그들은 사라졌지만, 일본군 군부대 흔적은 아무렇지도 않게 섬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처음으로 닿은 곳은 외양포 일본군 포진지와 외양포마을이다. 주차장 겸 전망대인 외양포전망대에서 발 아래 내려다보이는 외양포마을은 아름다운 자연 속 한적한 갯마을이다. 마을 쪽으로 걸어 내려가면 ‘외양포 일본군 포진지’ 이정표가 나오고, 200m 정도 더 내려가면 아픈 역사의 현장에 다다른다. 외양포 포진지 역사안내소를 지나면 콘크리트 바닥이 커다란 원 모양으로 패인 포대터가 눈에 들어온다. 280mm 유탄포가 설치됐던 자리다. 주변에는 작전 상황실로 활용된 엄폐 막사와 탄약고 3동 등 부대 시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역사안내소 바로 앞에는 일본군이 썼던 화장실터도 보인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외양포를 군사 거점으로 삼기 위해 주민들을 쫓아내고 포진지 공사를 대대적으로 진행했다. 주민을 쫓아낸 마을에는 병영을 구축했다. 배후 국수봉 산자락에는 지그재그로 말이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고 관측소와 산악 보루 등 군사 지원 시설을 배치했다. 일제는 1905년 진지가 완공되자 경남 진해에 있던 진해만요새사령부를 이곳으로 옮겨오며 주변 대항항과 새바지항으로 진지를 확대했다. 진지 구축에 조선인 징용자들이 강제 동원됐다니 가슴이 아리다.
역사안내소 바로 옆에는 ‘사령부 발상지지’ 건립비가 있다. 일본군이 외양포에 주둔한 사령부 부대를 기념하기 위해 1936년 세웠다. 김영기 관광해설사는 “건립비에는 사령부의 부대 편성과 상륙 시기, 건립 시기가 전후면에 기록돼 있는데, 이곳이 중추 기지였음을 의미한다”며 “일제가 패망한 뒤 마을로 다시 돌아온 주민들이 구덩이에 파묻혀 있던 것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전쟁 야욕에 눈멀어 거침없었던 일본의 위세가 패망으로 점철되면서 전쟁의 허망함을 느낀다.
부산에 119년 전 마을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면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외양포 포진지 아래에 있는 외양포마을이 그렇다. 외양포마을은 마을 전체가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구축한 병영이었다. 일본이 패망한 뒤 물러나고 남은 자리에 인근 주민들이 정부로부터 임차해 지금까지 거주하고 있다. 현재 32세대가 살고 있다. 이들이 사는 집은 헌병대 막사, 무기창고, 장교사택, 사병내무반 등 모두 일본군 사령부 건물들이다. 마을을 돌아보면 당시 무기 창고로 쓰였던 일본식 기와집 등 수리나 개조 없이 원형이 보존돼 있는 건물들도 몇몇 남아 있다.
건물은 하나지만 지붕의 색과 모양이 다른 집들도 보인다. 군사 시설로 쓰인 큰 건물이다 보니 한 건물을 여러 가구가 나눠 쓰게 되면서 가구를 나누는 경계가 됐다. 당시의 우물터도 8개나 마을 군데군데 남아 있다. 마을 최고 연령자인 109세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 주름살에 마을의 역사가 스쳐 지나간다.
외양포마을과 가까운 가덕도 최남단엔 가덕도등대와 가덕도동백군락지가 있다. 가덕도등대는 일제가 조선 수탈을 위해 드나드는 자국 선박의 안전을 위해 만들어 1909년 점등했다. 두 곳은 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군사보호시설 내에 있다. 천연의 비경을 보고 싶다면, 5일 전에 가덕도등대로 전화해 신원 조회 등에 필요한 서류 양식을 제출(이메일)해야 출입 허가를 받을 수 있다.
■‘다크 헤리티지’ 보존 가치 되새기다
외양포로를 따라 북쪽으로 차를 몰고 3분 정도 올라가면 이웃 마을인 대항마을이 나온다. 대항마을에는 인공 동굴 포진지가 있다. 해안 절벽에 6개의 인공 동굴이 있는데, 공개되지 않은 동굴 1개를 제외하고 5개 동굴은 해안 나무 덱길(약 400m)을 따라 걸으며 탐방할 수 있다. 3개의 동굴은 하나로 연결(175m)돼 있다. 동굴 입구에는 대포 모형이, 동굴 안에는 경례 중인 일본군 모형, 강원도에 있는 탄광 근로자들이 강제 징용돼 땅굴을 파고 암석을 나르는 모형, 일본군이 회의하는 모형 등이 전시돼 있다. 나머지 2개 동굴은 안이 막혀 있는 동굴이다. 길이가 10m 안팎이다. 대항항 북동쪽 새바지항에도 일본군의 인공 동굴이 있다. 현재 낙석 위험에 철제 펜스로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가덕도를 찾았다면 꼭 올라봐야 하는 곳이 연대봉이다. 연대봉은 가덕도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해발 459.4m)다. 등산로 입구에 있는 지양곡 주차장에 차를 대고, 연대봉 안내소를 지나면 등산로 입구인 나무 덱 계단이 나온다. 등산은 많이 어렵지 않다. 오르는 데 30대는 30분, 40대는 40분, 50대는 50분이 걸린다는 말이 있다. 덱 계단을 지나면 울창한 숲 사이로 비교적 완만한 산길이 이어진다. 봉우리로 향하는 길에서 굽어본 가덕도의 전경은 그야말로 절경이다. 마지막 구간이 제법 험준한데, 오르는 수고에 비해 훨씬 값진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 연대봉에 오르면 아름다운 해안선과 대항항, 천성항이 내려다보인다. 거가대교도 한눈에 들어온다. 시원한 바닷바람과 탁 트인 시야에 가슴이 뻥 뚫린다. 청명한 날씨에 시정도 좋아 대마도도 어슴푸레 보인다. 연대봉 정상석 뒤편으로는 고려 시대에 설치된 봉수대가 자리한다. 왜구의 침입이 잦아 설치한 봉수대다. 임진왜란 당시엔 왜군 함대를 가장 먼저 발견해 봉화를 올린 곳이다.
하산해 가덕도 북쪽으로 차를 몰면 천성진성과 가덕도 척화비를 만날 수 있다. 천성진성은 조선 시대 왜구의 침입이 잦자, 성을 축조해 수군을 주둔케 한 성이다. 성곽이 많이 훼손된 상태지만 부산시와 강서구청이 문화재 발굴 조사와 성곽 복원을 추진 중이다. 천성진성 안내판 옆에는 이순신 장군 전적비도 있다. 천성진성은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이 왜군의 서해안 진출을 저지한 교두보였다. 가덕도 척화비는 천가초등학교 교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왼쪽에 있다.
마지막 여정은 정거마을이다. 고즈넉한 갯가 벽화 마을이다. 마을 동쪽 끝까지 약 300m 골목이 아기자기한 벽화로 장식돼 있다. 가리비 껍데기로 만든 물고기와 숲 벽화가 특이하다. 마을 사람들은 굴 종패(씨조개) 양식을 한다. 가리비는 굴 종패에 쓰이는데, 마을 곳곳에 가리비 껍데기가 산을 이루고 있다.
가덕도는 어두운 역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지만, 이 또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임을 깨닫게 해주는 ‘다크 투어리즘’ 코스다. 몇 년 뒤 신공항이 들어설 예정이어서, 역사의 자취가 사라질까 우려도 크다. 김영기 관광해설사는 말한다. “신공항 건설로 일제 침략의 많은 흔적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없어지는 게 어떠냐고 말하지만, 뼈아플지라도 역사는 남겨져 보존될 때 당시의 비극을 기억하고 교훈을 새길 수 있습니다.”
이대성 기자 nmak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