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칼럼] 평범한 얼굴을 한 '은둔형 외톨이'
주영은 공모 칼럼니스트
살인의 동기는 무엇일까. 최근 또래 여성을 무참히 살해한 살인사건의 가해자를 두고 다양한 분석이 나오고 있다. 5년 동안 타인과 접촉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은둔형 외톨이’여서 벌인 범죄라는 말이 나오기도 하고, 영어 콤플렉스가 있었다는 진술을 들어 ‘열등감’ 때문에 일어난 살인이라는 의견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피의자는 “그냥 살인을 해 보고 싶었다”는, 단순해서 더 경악스러운 답변을 내놓았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만 ‘이래서 그랬을 것이다’ ‘저래서 그랬을 것이다’라며 퍼즐 조각을 맞춰 가고 있는 형국이다.
처음 뉴스를 접했을 때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단어는 ‘은둔형 외톨이’였다. 2023년을 살고 있는 같은 20대 청년으로서 ‘은둔형 외톨이’라는 단어 안에 얼마나 많은 스토리가 내포되어 있을지 조금은 가늠이 되었다. 피의자를 이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순간적으로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친구의 얼굴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고, 소식을 들은 지 오래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잔혹한 범죄 뉴스 앞에 붙은 ‘은둔형 외톨이’라는 단어가 생각보다 평범하게 느껴진 까닭이다.
20대 여성 일면식 없는 또래 살해
“그냥 해 보고 싶었다” 충격적 답변
은둔형 외톨이가 낳은 범죄 분석
코로나19 겪으며 고립 청년 급증
사회적 소통 차단 현실감 둔화 심각
이들을 품는 대안의 공동체 성찰을
일본에서는 이미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워낙 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집 안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히키코모리로 지내는 기간이 통상 12년 정도라는 조사 결과도 있고, 잔혹한 범죄 사건의 가해자가 알고 보니 히키코모리였다는 뉴스도 넘친다. 그래서일까. 어느새부터 히키코모리라는 단어가 ‘잠재적 범죄자’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어딘가 음습한 곳에 숨어 범죄를 꾸미고 있을 것 같은 이미지 말이다.
그런데 사실 주변을 조금만 돌아보면, 은둔형 외톨이는 특별히 이상하거나 별난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아마 20~30대 청년들 중에 취직이나 입학시험을 준비한다는 친구랑 연락이 끊기고, 그들의 소식을 듣지 못한 채로 몇 년이 흐른 것을 경험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저마다의 사정으로 방 안에서 고립된 청년들이 2021년 기준 53만 8000명에 달한다고 한다. 청년 100명당 5명꼴이다. 은둔형 외톨이는 TV에서나 볼 수 있는 특별한 사람이 아닌, 어쩌면 고등학교 동창, 옆집에 사는 아이, 가까운 친척 중 누군가일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잔혹한 이 범죄의 양상이 더 끔찍하게 느껴진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그냥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나 주변 이웃들처럼 느껴져서 말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분석했듯이 은둔형 외톨이로 살기 시작하면 현실감각이 떨어지고, 잘못된 생각이 수정될 기회를 놓치고, 자기만의 생각에 빠지게 된다. 물론 살인의 이유를 한 가지로 압축할 수는 없겠지만, 이번 살인사건을 갈수록 높아지는 청년들의 고립과 은둔 문제와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고립된 청소년·청년들과 관련한 문제의 원인을 적극적으로 분석하고, 예방책 마련을 위한 초석으로 삼았으면 한다.
고립·은둔 상태의 청년은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크게 늘어났다고 한다. 2019년에 고립·은둔 청년의 비율은 3.1%였고 3년 만에 20만 4000명가량 증가했다. 설문조사 결과,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청년들은 전반적으로 삶에 대한 만족도가 매우 낮았다. 이것이 그들이 세상에 속하지 못하거나 속하지 않기를 택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영국의 BBC 방송은 한국의 고립·은둔 상태의 청년 문제를 소개하면서 한국 사회의 높은 기대치에 압박받은 청년들이 많다고 분석했다. 이들은 다양한 이유로 사회라는 공동체에 속하길 거부했고 공동체로부터 거부당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누군가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진 않은지 계속해서 점검해야 하는 이유다.
사람은 날 때부터 가정이라는 공동체에서 시작한다. 세상을 배우며 사람들과 유의미한 상호작용을 하고 잘못된 생각도 수정해 나간다. 살아가는 데 있어 공동체는 필수적이다. 그래서 청년들에게 더 많은 대안적 공동체가 있었으면 한다. 학교나 회사와 같이 당장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공동체도 좋지만, 성과나 성공에 대한 압박을 받지 않고 자유로이 존재해도 되는 공동체도 필요하다. 존재 자체만으로 인정받는 공동체는 점점 사라지는 것 같다. 심지어 가정에서조차 압박을 받는다. 이런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결국 방 안에 틀어박히는 선택을 하는 게 아닐까. 이런 안타까운 뉴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적극 돕고 싶다. 지금 서 있는 각자의 곳에서, 성과가 아닌 존재를 품어 줄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면 좋겠다. 누군가의 빈자리를 알아차리고 살펴주는 공동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