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누더기 무궁화호
1993년에 발매된 가수 김광석의 리메이크 앨범에 수록된 노래 ‘이등병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는 날/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 밖을 나설 때~”. 입대하는 청년의 심정이 김광석 특유의 호소력 짙은 음색과 어울려 잔잔하게 다가온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청년이 타고 갔을 열차에 생각이 미친다. 왜 열차였을까. 그땐 KTX가 없었으니, 아마 무궁화호 열차였을 것이다. 순식간에 시야에서 달아나는 KTX보다 되새김질하듯 조금씩 멀어지는 무궁화호 열차가 애틋한 이별의 정한과 더 잘 어울린다.
첨단 고속 열차인 KTX가 대세인 요즘이지만, 그래도 기차 여행 하면 아직 무궁화호가 먼저 떠오른다. 급한 용무가 있는 사람에게 무궁화호의 다소 느린 속도는 답답할 뿐이겠지만, 오히려 이런 적당한 속도감이 사람을 더 편안하게 한다. 덜컹덜컹 바퀴 소리를 들으면서 멍하니 차창 밖 풍경을 보는 맛은 무궁화호를 따를 만한 것이 없다.
사실 KTX를 탈 때마다 느끼지만, 열차 내에서 할 수 있는 소일거리가 거의 없다. 빠른 속도로 수많은 터널을 들락거리는 통에 책을 읽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바깥 풍경을 보기도 힘들다. 목적지에 일찍 도착하는 것 외엔 달리 내세울 게 없다. 음식으로 치면 급히 한 끼 때우는 데 요긴한 패스트푸드와 비슷한 느낌이다.
반면 무궁화호는 집밥에 비할 수 있겠다. 넓은 좌석에 딸린 넓은 차창으로 느릿느릿 흘러가는 풍경을 보면서 느림의 여유를 맛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KTX 시대에도 이런 여유를 맛보기 위해 무궁화호를 애용하는 사람이 여전히 적지 않다.
하지만 철도를 운영하는 코레일 입장에선 무궁화호는 퇴출 대상이다. 2029년까지 차례차례 감축 또는 폐지되고 있다. 이렇다 보니 기존 노후 차량에 대한 보수 등은 아예 뒷전이다. 부산~서울 운행 무궁화호가 페인트가 벗겨지고 녹이 슨 누더기 모양으로 운행되어도 손 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승객들이 보기가 딱하다며 더 민망해한다.
수익성과 속도라는 대세에 맞지 않는다고 무궁화호를 완전히 천덕꾸러기 취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궁화호 특유의 장점을 살린다면 오히려 힐링 열차, 느림의 열차, 심야 열차 등 다양한 활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가능성은 도외시한 채, 당장 돈이 되지 않는다고 외관부터 누더기로 방치한 철도 당국의 단견과 무관심이 아쉽기만 하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