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왜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을까?
영화평론가
‘Under the Sea’의 밝고 유쾌한 곡조를 나도 모르게 흥얼거린다. 어린 시절 몇 번이나 돌려보았던 그 애니메이션. 물거품이 돼버린 인어공주의 슬픈 이야기에 남몰래 눈물 흘렸던 동화가 실사화된다는 소식에 그 누구보다 기뻤다. 그러나 개봉 전부터 들려온 동심 파괴나 원작 훼손이라는 씁쓸한 소식은 영화를 기다리던 올드팬을 지치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롭 마샬 감독의 ‘인어공주’는 논란 의식에 의문이 들 만큼 시대 의식을 잘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 ‘인어공주’는 원작 동화와 다른 점이 보이는데 먼저 여섯 자매를 7대양에서 온 다양한 인종의 인어들로 다시 읽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동화 속 인어공주에서 애리얼은 뭍의 세계를 경험한 언니들을 부러워하는 내성적인 공주였다면, 영화 속에서는 바다 너머의 세계를 꿈꾸며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찾아나가려는 인물이다. 자신과 다른 모습을 한 인간에게 적대적이지 않는 점도 인상적이다. 바다의 왕이자 에리얼의 아버지인 트리톤은 바다와 육지의 경계를 확실히 나누고, 인간을 적으로 생각해 에리얼의 자유로운 행동을 속박하려 든다. 인간에게 아내를 잃은 트리톤은 인간을 위험하고 교류가 불가능한 종족으로 여긴다.
흑인이 주인공인 영화 ‘인어공주’
육지 동경하는 적극적 성격 가져
‘정치적 올바름’ 담은 디즈니 작품
공주·왕자에 대한 선입견 깨뜨려
하지만 에리얼은 아버지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며 육지 세상을 끊임없이 동경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처럼 육지의 왕자님을 만난다. 에리얼이 사랑에 빠지는 에릭 왕자도 특별하다. 1989년 안데르센의 동화에 등장한 왕자는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인어를 알아보지 못한 답답한 존재로 그려졌다면, 영화 속 에릭은 다르다. 흑인 어머니를 둔 그는 입양아이며 따분한 궁에 틀어박혀 있기보단 목숨을 내어놓더라도 원하는 것을 직접 찾아 나서는 개척자로 등장한다. 에리얼과 에릭은 기존의 수동적인 인물에서 벗어난 동시에 피부색이나 입양아라는 설정을 통해 뿌리 깊게 박혀 있던 차별과 편견을 무너뜨리는 존재로 등장한다.
이때 육지의 통치자가 흑인 여왕인 것도 흥미롭다. 여성의 인권과 더불어 혈연 중심의 가족 구성을 자연스럽게 타파하려는 디즈니의 설정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최후의 보루였던 트리톤까지 육지 인간들에게 마음을 여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다소 억지스럽게도 다가오지만, 동화를 원작으로 삼았음을 감안한다면 감동적이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다양성은 부정되고, 공존이나 조화 따위는 이제 정말 판타지가 돼버리지 않았는가. 인어공주가 흑인이라는 게 분노할 이유가 되어버린 이 세상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 인간 세계와 인어 세계의 화합은 어떤 의도가 분명히 숨겨져 있다.
디즈니는 몇 년 전부터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주의’를 앞세워 인종, 성별, 문화, 취향의 다양성을 고려한 작품들을 내놓고 있다. 다민족국가인 미국에서 정치적인 관점으로 차별·편견을 없애는 게 올바르다는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을 옹호하거나 비판하기에 앞서 편견과 차별 없이 관람하게 만들 콘텐츠를 만든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싶다. 그것이 비록 과도하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사실 생각해 보면 수많은 디즈니 작품 속에 등장하는 공주와 왕자들을 보면, 왜 그들이 푸른 눈에 금발 머리를 하고 있는지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은 이유를 묻고 싶다. 왜 상상 속의 공주는 늘 백인의 모습이었는가 말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다인종·다문화가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영화 한 편을 두고 여전히 국가주의와 인종 차별이 잔재한 우리 시대의 풍경을 발견하면 씁쓸하다. 그래서 흑인 에리얼이 더 많이 더 널리 보여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