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학수의 문화풍경] 양산 통도사 반야용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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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대 철학과 교수

현실의 갈망 내치지 않으면서도
고통에서 해방되는 건 불가능한 일일까
이에 대한 붓다의 최고 지혜가 ‘반야’
초파일 벽화에서 ‘깨달음’의 화두 만나

양산 통도사 천왕문을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니 반야용선도(般若龍船圖)가 보인다. 이 그림은 극락보전 뒷벽의 벽화이다. 이날은 사월 초파일(5월 27일)이라 많은 시민들이 절을 찾았지만, 그림 앞에는 불과 서너 명이 모여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림은 색이 심하게 바랬으며, 중앙 부분은 아예 사라져서 별 인기가 없는 듯했다. 2020년 9월 태풍 마이삭 때문에 그림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반야용선도는 바다를 가로지르는 배 그림인데,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선두(船頭)와 선미(船尾)가 용의 머리와 꼬리 형태를 취하고 있어서 승객들이 마치 용을 타고 물을 건너는 듯하다. 그림 이름에 ‘용선’이 들어있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그럼 ‘반야’는 무엇일까? 반야는 범어(梵語) ‘프라즈나’(prajna)의 음사(音寫)이다. 중국 후한(後漢) 시대부터 불교 경전이 한어(漢語)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구마라집(鳩摩羅什)과 현장(玄奘) 같은 초기 번역가들은 불번(不飜)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뜻이 여러 개이거나 심오한 용어는 뜻을 옮기기 힘들므로 번역하지 않고 소리만 묘사한다는 것이 불번의 원칙이다. 프라즈나는 어원을 고려하면 앞선 지혜, 최고의 발견, 또는 초월의 깨달음인데, 이렇게 의미가 다양하므로 그들은 뜻으로 번역하지 않고 소리를 묘사하여 “반야”라고 하였다. 프라즈나를 ‘지혜(智慧)’ ‘대지(大智)’라고 번역한 사람도 있었다.


불교에는 범어를 한어로 음사한 용어가 꽤 있다. 보살(菩薩)은 범어 ‘보디사트바(bodhisattva)’의 한어 음사이다. 보디사트바는 ‘보디’와 ‘사트바’의 합성인데, 보디는 깨달음의 상태이고 사트바는 사람을 뜻해, 보디사트바는 일반인이 깨달음을 얻도록 도와주는 사람이거나 지혜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보디사트바는 ‘보리살타’로 음사되고, 보살은 보리살타를 줄인 말이다. 불자들은 여러 보살을 숭배한다. 관세음보살 또는 관자재보살은 그림이나 상에서 많은 팔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사랑의 손길을 많은 사람에게 뻗는다는 것을 상징한다. 문수보살은 도상(圖像)에서 오른팔에 칼을 들고 있는데, 그것은 무지를 잘라버리는 날카로운 지혜를 상징한다.

부처는 불타를 우리 발음으로 읽은 것인데, 불타는 범어 ‘붓다(buddha)’의 소리를 한자로 기록한 것이다. 처음에 붓다는 불타(弗陀)로 음사되다가, 붓다가 사람이었다는 점을 감안해 ‘弗’ 앞에 ‘人’을 넣어 글자 ‘佛’을 만들었다. 붓다는 ‘무지나 미망의 잠에서 깨어난 사람’이란 의미이므로, 뜻으로 번역한다면 붓다는 각자(覺者)일 것이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모든 사람을 호칭하는 일반 명사인데, 그냥 붓다라고 부르면 가우타마 붓다를 가리킨다. 그의 본명은 싯다르타 가우타마인데, 기원전 6세기 인도 북부의 룸비니 마을에서 태어났다. 싯다르타는 출가하여 먼저 명상 수련을 배웠다. 그는 명상 수련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루어 최고 몰입의 경지에 도달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명상의 깊은 상태가 일시적으로 행복과 평온을 가져다주지만, 고통의 문제에 대한 지속적 해결책을 제공하지는 못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싯다르타는 새로운 방식으로 수행을 계속했고, 결국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었다.

싯다르타는 붓다가 된 후 깨달음의 지혜를 펴기로 결심하고, 이전에 함께 고행했던 다섯 수행자가 있는 바라나시의 녹야원으로 찾아갔다. 이곳에서 붓다는 처음으로 강의를 하였는데, 그것을 기록한 글이 전법륜경(轉法輪經)이고 중심 내용은 중도(中道)와 사성제(四聖諦)이다.

붓다는 쾌락주의와 금욕주의의 중도를 우리에게 권한다. 쾌락주의는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는 통속적 태도이며, 금욕주의는 모든 쾌락을 버리는 자기 학대의 태도이다. 붓다는 두 자세 모두 우리가 피해야 할 극단이라고 말한다.

사성제는 4가지 고귀한 깨달음인데, 고통의 원인과 해방에 관한 지혜이다. 붓다는 고통의 원인을 갈망 때문이라고 본다. 갈망 때문에 목표가 생기고, 목표에 마음이 다가가 붙어 있으면 그것이 집착이다. 갈망이 고통의 근원이니 갈망을 없애면 고통은 제거될 것이다. 그러나 갈망은 인생을 끌고 가는 동력이므로 갈망을 제거하면 죽어버리고, 갈망을 줄이면 삶은 밋밋하게 된다.

갈망을 제거하지 않으면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없는가? 이에 대한 붓다의 깨달음이 최고 지혜, 프라즈나(반야)이다. 반야용선도는 고통의 세상에서 해방의 세상으로 우리를 나르는 반야의 배이다. 2023년 사월 초파일 통도사의 벽화를 보며, 붓다가 가르쳐주는 반야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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