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 시대 문화풍경] 사라져가는 장소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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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강사

부산 영도 봉래탕에서 열린 팝업스토어 몰래탕. 매끈목욕연구소 제공 부산 영도 봉래탕에서 열린 팝업스토어 몰래탕. 매끈목욕연구소 제공

여기, 한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아들은 어릴 적 엄마와 누이의 손을 잡고 여탕을 드나들었다. 커서는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보며 아버지를 원망했고, 아버지가 돈이 무서워 목욕탕도 가지 않는 것이라고 함부로 비난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쓰러지고 난 뒤에야 알았다.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 자국”. 부끄러워 자식에게도 차마 보여줄 수 없었던 ‘적막하디 적막한’ 아버지의 등은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아버지의 삶의 내력이었다. 손택수 시인의 ‘아버지의 등을 밀며’는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에 가고 싶었던 아들의 마음을 곡진하게 담았다. 병원 욕실에서나마 등을 밀며 아버지의 고단한 생애를 눈물로 이해하지 않았을까.

누구에게나 목욕탕에 관한 유년의 기억이 있다. 나이를 속여 어머니와 함께 여탕에 드나들다 같은 반 여학생을 만나 곤욕을 치렀던 에피소드도 있을 테다. 옹기종기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한바탕 폭소가 터지기도 하고 별안간 눈물바다가 되기도 한다. 동네 목욕탕은 숱한 추억이 깃든 장소였다. 씻는 것이 어디 육신의 때뿐이랴. 탐욕과 증오, 어리석음으로 얼룩진 마음까지 정결하게 한다. 불교경전 〈온실경(溫室經)〉에서도 목욕에 빗대어 마음의 때 탐진치(貪瞋痴)를 극복하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설파하고 있지 않은가. 목욕탕은 벌거벗은 자신과 오롯이 마주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즈음 대중탕 굴뚝이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다. 삶의 양식과 주거환경의 변화로 욕객이 감소한 데다 비용이 가파르게 상승했기 때문이다. 매끈목욕연구소는 사라져가는 동네 목욕탕 문화의 복원에 관심을 두었다. 영도 봉래탕 휴업일에 열린 팝업스토어 ‘몰래탕’에는 볼거리와 즐길거리, 잊혀져 가는 것들에 대한 생각거리가 가득했다. 캐릭터 ‘때쟁이들’을 개발해 대중적 관심을 촉발하는가 하면, 부산 곳곳에 남아있는 동네 목욕탕을 기록한 매체 〈집 앞 목욕탕〉을 발간할 예정이란다. 카페나 문화시설로 리모델링하는 흐름과는 사뭇 다른 동네 목욕탕 문화의 재발견이다.

우리 삶의 모든 행위와 사건은 구체적인 장소에서 일어난다. 특정한 장소에서의 경험은 그 장소를 의미화한다. 고유하고 사적인 공간이라는 느낌과 그곳에 함께 깃든 이들과의 친밀감이 장소감 또는 장소성을 부여한다. 레이 올든버그는 가정을 제1의 장소, 학교와 일터를 제2의 장소, 다양한 사람들이 목적 없이 어울리는 장소를 제3의 장소라 했다. 제3의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교류는 독특한 일상의 리듬을 만든다. 동네 선술집이나 카페, 미용실과 목욕탕에도 다시 눈길을 주어야 하는 까닭이다. 소중한 가치는 쉽게 잊히거나 사라져가는 공간에서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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