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말(馬), 치유의 영물
임진왜란 때 황대중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다리를 저는 장애인으로 큰 공을 세웠는데 그 스토리가 숙연하다. 죽어가는 어머니를 살리려고 왼쪽 다리 허벅지 살을 잘랐고, 한산대첩에서 왜군 총탄에 맞아 오른쪽 다리를 다쳤다. 황 장군이 정유재란 남원전투에서 전사했을 때 그의 말(馬)이 보인 행동은 더욱 숙연하다. 눈물을 흘리며 장군 곁을 떠나지 않더니 주변에서 장군의 시신을 수습해 등에 태우자 300리 길을 내달려 장군의 고향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말은 먹는 것을 거부하다 장군의 장례가 끝나고 3일 후에 죽었다고 한다. 전남 강진군 작천면 용상리 구상마을에 내려오는 말 무덤 전설이다.
말과 인간이 맺은 역사는 수천 년에 이른다. 우크라이나 데레이브카 지역에서 사람과 말의 새로운 관계가 이뤄진 흔적이 발견된 게 6000년 전이었다. 야생마 무리를 쫓아 사냥하거나 식용으로 삼았던 기존 패턴에서 한 걸음 나아간 것이다. 이후 말은 인간 세상 깊이 들어와 큰 영향을 끼쳤다. 천마(天馬), 신마(神馬), 기린마 같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말은 예로부터 성스러운 영물로 통했다. 우리 건국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혁거세, 금와왕, 동명성왕 같은 탄생 설화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말이다.
말은 또한 천성이 착한 생명체다. 온순하여 남을 해칠 줄 모른다. 상대를 배려하는 너그러운 성향 덕분에 장애인의 치료를 돕는 재활승마 분야가 생기기도 했다. 그런데 치료의 영역은 신체에 그치지 않는다. 사람은 말의 큰 눈망울을 쳐다보면 마음의 평안과 힐링을 얻게 된다. 사람만큼 감정이 풍부한 말과 함께 있으면서 체온과 숨결을 느끼는 것만으로 치유가 되는 것이다. 이를 ‘홀스 테라피(horse therapy)’라 한다. 일종의 동물 매개 치료로, 말과의 정서적 교감을 통해 심리적 안정과 스트레스 완화를 꾀하는 방법이다.
최근 홀스 테라피 체험 행사가 부산 강서구 렛츠런파크에서 진행됐다는 소식이다. 참여자들이 직접 말에게 간식을 주고 함께 산책하면서 힐링과 공감의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한국마사회 부산경남공원과 지역 병원 4곳이 올해 4월부터 환자들을 대상으로 펼치는 사회공헌 사업으로, 인간과 말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점을 잘 활용한 사례다. 말은 요즘 흔한 반려동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축도 전시 동물도 아니다. 인간을 치유하는 힘이 있는 만큼 이제 그에 걸맞은 위상을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