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 만나고 꼭두 친구 삼던 아픈 시절, 그의 동화가 됐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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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문학가 임신행 자료전’
창원시립마산문학관 개최
스승 이주홍의 편지 등 전시

임신행 동화작가와 1992년 수상한 ‘황금도깨비상’ 상패 조각품. 창원시립마산문학관 제공 임신행 동화작가와 1992년 수상한 ‘황금도깨비상’ 상패 조각품. 창원시립마산문학관 제공

마산에 임신행 동화작가가 있다. 창원시립마산문학관은 지난 10일부터 오는 7월 29일까지 ‘아동문학가 임신행 자료전’을 열고 있다. 저서 62권과 문학적 생애가 고스란히 담긴 사진, 문화예술인들과 주고받은 편지, 돌 도깨비, 널배 등 총 400점이 나와 있다.

1940년생인 작가는 “도깨비와, 상여에 달린 꼭두가 친구”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아픈 사연이 있다.

임신행 작가는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해방 후 일본서 고된 시집살이를 했던 어머니는, 일본인 남편을 뒤로한 채 어린 아들 둘만을 염소새끼처럼 이끌고 경북 김천 친정으로 귀국했다. 임신행은 5세, 동생은 3세였다.

어머니는 일자리를 찾아 부산에 가고, 어린 둘은 외가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로 모진 눈칫밥을 먹었다. 동네 아이들은 ‘쪽발이 새끼’라며 천대했고, 심지어 돌멩이를 던지기도 했는데 그때 맞은 상처가 팔순 작가 머리에 아직 흉터로 남아 있다.

서럽던 그 시절, 외삼촌 셋에게 번갈아 매질을 당하며 내쫓기도 했는데 그러면 향교나 누대, 상엿집의 어둠과 무서움 속에 들고양이처럼 쭈그리고 앉아 ‘도깨비’를 만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재수 좋은 날, 상엿집에 떡 곶감 밤 같은 장례용 음식이 있었는데 그걸 먹고 꼭두를 가지고 놀았다. 그는 도깨비와 꼭두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전율 같은 부성애, 모성애를 느끼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동화가 됐다고 한다.

1960년대 임신행은 생활고 때문에 베트남 파병을 지원할 만큼 절박했다고 한다. 임신행 문학에서 그가 스승으로 모시는 이원수 선생도 중요하지만, ‘너는 심성이 아동문학을 할 사람’이라며 임신행을 발견·격려한 최계락 시인도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박종순 문학평론가). 그런 길을 걸어 임신행은 권정생 이오덕 정채봉 배익천 송재찬 등과 함께 1970년대 한국 아동문학을 풍부하게 했다는 것이다.

임신행은 친구보다 ‘친고(親故)’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60여 년 친고가 셋 있는데 시인 김종해와 오규원, 그리고 시조 등단, 모 기업 중책의 이력을 지닌 안정효(소설가·번역가와 동명이인)다. 임신행은 부산 시절에 셋과 한 달에 두어 번 만났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보수동 책방 골목이며 광복동 음악실, 남포동 서점을 갯바람처럼 누비고 다녔었다’고 한다. 셋 중 김종해 시인을 빼고 둘은 세상을 졌다.

친고들의 글과 ‘스승이자 또 다른 아버지’였던 향파 이주홍이 그에게 유서처럼 보낸 편지 등이 이번 전시에 나와 있다. 작가는 “어릴 적 저와 씨름을 벌이던 도깨비는 결국 저에게 꿈과 희망을 줬다”며 “수많은 ‘피눈물’의 곡절이 파도처럼 밀려온 제 삶을 비출 때 분명 동화는 위대한 무언의 교사”라고 했다. 그의 삶은 그 ‘위대한 무언의 발견’에 값하고, 그것에 바쳐졌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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