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자처럼 인감처럼, 슬픔과 삶 시집에 새기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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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60대 시인 새 시집
20년 넘는 시력이 주는 깊이감

송유미 “세상 모든 시, 삶 도와”
권애숙 “시조는 아득한 첫사랑”
김예강 모더니즘 시집 선보여


송유미의 <점자 편지>(실천문학사), 권애숙의 <첫눈이라는 아해>(시인동네), 김예강의 <가설정원>(시인의일요일)은 저마다 개성으로 빛나는 시집이다. 이들은 20~30년 시력(詩歷)을 지닌 부산의 60대 여성 시인이다. 60대는 이미 몇 고개를 넘어 자기 길을 한창 걸어온 나이다. 그들의 언어가 내고 있는 길, 가닿으려는 지점은 웅숭 깊은 바가 있다.

송유미가 철필로 쓰는 ‘점자’는 애처로운 우리 뭇 삶의 사연이다. 이산가족, 노숙인, 썩지 않은 군화로 남은 무명의 한국전쟁 전사자, 침몰한 오룡호와 운명을 같이한 선장 등 다양한 이들이 나온다. 시인은 세상에 이름 없이 묻힌 밑바닥 삶의 아픔과 슬픔을 ‘황금 비율’로 드러내려 했다.

세상은 어떤가. ‘죽을힘을 다해 살다가 끝내 떠나고 만/막내 영정 앞에/거금 오십만 원짜리 소가죽 구두 한 켤레 선물한다/(그래, 이 헌신짝 같은 세상을 네가 버리고 가는 거다!)’(39쪽). ‘헌신짝 같은 세상’이 우리 사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세상도 ‘목숨을 걸어야 깊이를 알 수 있’(121쪽)는 법이다. 시인은 그 세상 속에서 ‘목울대가 까맣게 타버린 시의 꽃으로’(23쪽) 살았다고 한다.

애처로운 뭇 삶, 타버린 시인의 삶, 헌신짝 같은 세상을 모두 다 담을 수 있는 것은 뭘까. ‘어머니의 붉은 다라이’다. 시에 나오는 범상하지만 소중한 기억의 이미지가 ‘붉은 다라이’다. ‘붉은 다라이 머리에 인 엄마가 걸어온다’(76쪽). 붉은 다라이의 엄마, 목말 태워준 아버지는 우리 삶의 밑자리에 있는 ‘그 무엇’이다. ‘허리 굽은 아버지에게/사랑한다고 말 한번 하지 못했습니다/당신의 목말 타고 자랐어도’(118쪽). 시인은 “밥을 먹는 것, 똥을 누는 것, 움직일 수 있는 것, 그 모든 것이 삶의 기적”이라며 “세상 모든 것이 시를 돕고 있고, 세상 모든 시들이 삶을 돕고 있다”고 말한다.

권애숙의 <첫눈이라는 아해>는 5권 시집과 1권 동시집을 낸 그의 첫 시조집이다. 그는 1994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로 등단했었다. 그는 “시조는 내게 아득한 첫사랑이다. 전설이고 신화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시조는 우리 저마다 삶의 그 유일함에 대한 무한한 가치와 의미를 새긴다. 그는 신화를 쓴다. 지상의 모든 것은 쓸쓸하지만 우리 삶을 싣고온 누추한 ‘발바닥이 인감’(86쪽)이란다. 또 ‘천년을 산 노거수가 이 동네 주필이네’(90쪽), ‘풀잎도 말씀이다 쥐구멍도 말씀이다/굴뚝도 담벼락도 기침 같은 말씀이다/서문도 발문도 없는 미어지는 한 권이다’(‘제2막’ 중에서)라고 노래한다. 자갈치시장 아지매들이 예사롭지 않다. ‘어디에 몽돌밭이 이만한 곳 있을까 닳은 몸 닳은 손금 둥글게 금도 간 채 해풍도 자갈갈갈갈 아지매들 웃음소리//(중략)//오늘이 저물어도 걱정 없다 안 카나 자갈치 아지매들은 달도 별도 된다카이’(‘아가미가 생기는 곳’ 중에서).

경북 선산 출생인 그는 경상도 사투리를 박목월처럼 능수능란하게 구사한다. ‘언지예/무신 말씀/그림자도 와따라예/나 시방 달리 갈낑께/거기 단디 기다리이소/살무시 문 끼라노코/방방 절절 테파노코’(‘톡, 톡’ 중에서).



김예강의 세 번째 시집 <가설 정원>은 모더니즘 시집이다. 그의 시는 좀 어려우나 자신의 문법 속에서 단아하다. ‘지금 난 슬픔입니다’(26쪽), ‘당신은 어디가 아픕니까/집은 있나요’(39쪽)라는 것이 그의 시의 주된 정서 같다.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채 소멸되는 슬픔도 있다 주인공들은 이미 슬픔을 남겨둔 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든지 슬픔을 벌써 내던지고 달아나 버리든지 (중략) 슬픈 사람은 돌아누워 운다 등을 보이고 얼굴을 숨긴다.’(‘스윙 인 흰여울-창을 열다’ 중에서). 그의 시는 돌아누워 얼굴을 숨기고 있는 슬픈 사람의 시 같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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