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원 칼럼] 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청춘
논설실장
부산 점령한 ‘6월의 여왕’ 수국
다채로운 빛깔로 시선 사로잡아
다시 맞이하는 호국보훈의 달
국가보훈부 승격·출범 의미 더해
이제는 보훈의 일상화·저변화 긴요
나라 위한 저마다의 헌신 되새겨야
꽃의 나라에서 5월의 여왕이 장미라면 6월의 여왕에는 이제 수국이 등극한 듯하다. 꽃보다 녹음이게 마련인 6월이지만 부산 곳곳에는 형형색색의 수국이 때맞춰 물결을 이룬다. 영도 태종사에서 열리는 수국 축제를 부러 찾아가야 알현할 수 있었던 수국이 어느새 부산 전역을 점령했다. 거기다 ‘눈으로 보세요, 주인 있습니다’ ‘수국 뽑아 가지 마세요, CCTV 지켜봅니다’라는 팻말까지 경비병으로 거느려 수국의 시대, 수국의 나라가 치세를 누린다.
수국의 매력은 아무래도 그 다채로운 빛깔에 있다. 색색이 빛나는 태깔이 보석 못지않다. 시간을 따라 하얀색에서 파랑을 거쳐 보라색으로 변하고 토양이 산성이면 파란색, 알칼리성이면 빨간색에 가까워진다. 그 파스텔톤의 변화무쌍함이 오죽했으면 제주 사람들은 수국을 일러 ‘도채비고장’(도깨비 꽃)이라 했을까. 옛말에 ‘도깨비도 수풀이 있어야 모인다’고 했다. 수국의 천변만화하는 색깔을 뒷받침하는 것은 꽃을 떠받든 잎과 줄기의 그 싱싱한 푸르름에 있다.
수국의 계절 6월은 신록의 계절이다. 푸르디푸른 6월의 신록은 이 땅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멍에의 흔적이기도 했다. ‘6·25’라는 전쟁의 상흔이 유월을 삼켜 베이비 부머 세대(1955~1963년생)에게는 반공 혹은 승공, 이데올로기, 전쟁 따위를 떠올리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는 계절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때의 반공 웅변대회,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되는 교련, 그리고 대학에서의 병영 훈련과 전방 입소 등을 통과의례처럼 거친 뒤 군에 들어가야만 했다.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 년/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나 죽어 이 흙 속에 묻히면 그만이지/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내 청춘….’ 대학 다닐 때 ‘늙은 투사의 노래’라는 운동가요로 알고 있었는데 막상 강원도 전방부대에 입대하니 그 부대에서 오래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오는 곡이어서 황당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부대에서 전역을 앞둔 선임하사를 위해 작곡가가 막걸리 얻어먹고 지은 노래였기 때문이다.
김민기 작곡, 양희은 노래의 ‘늙은 군인의 노래’는 청춘을 군에 바친 한 늙은 선임하사를 위한 헌사였음에도 불구하고 패배주의적인 가사라는 이유로 국방부 장관 지정 금지곡 1호가 되었고, 햇빛을 보지 못한 채 음지로 파고들어 시위 현장마다 군인 대신 투사, 노동자, 농민, 교사의 노래로 변주됐다. 그러다 2018년 현충일 추념식에서는 추모곡으로 불렸고, 2020년 6·25전쟁 70주년 행사에서는 국군 전사자 유해 귀환 배경음악으로 가수 윤도현이 부르기도 했다.
‘늙은 군인의 노래’가 진보와 보수, 좌와 우라는 정치 세력을 따라 냉탕과 온탕을 오갔듯 ‘빽 있고 돈 있는’ 사람은 안 간다는 군에서 천덕꾸러기 신세였지만 그나마 나라를 지킨 이는 주변의 장삼이사들이었다. 모든 사람이 군에 가는 징병제 혹은 국민개병제의 나라에서 당당한 호국의 주역이었다. 군에 간 아들이 입고 간 옷가지를 받아 들고 눈물짓던 이 땅의 어머니야말로 역경에 굴하지 않는 호국의 여전사에 다름 아니었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이 마냥 푸르름을 유지하려면 정권의 향방에 따라 시류를 타지 않는 보훈의 원칙이 정립돼야 한다. 보훈의 일상화, 저변화를 통해 호국보훈이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 존재한다는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박민식 보훈부 장관이 최근 청년 제대군인들을 만나 병역의무 이행에 따른 불이익을 막겠다고 나선 것은 높이 살 만하다. 대학 복학생이 예비군 훈련에 갔다가 수업에 빠지는 바람에 결석 처리돼 장학금을 받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6월 5일 국가보훈부가 출범했다. 1961년 군사원호청으로 출발한 지 62년 만에 보훈처가 마침내 부로 승격한 것이다. ‘국가가 끝까지 책임지는 일류보훈’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한 분을 존중하고 기억하는 나라’라는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가 열매를 맺은 데 따른 것이다. 세계 유일의 유엔군 추모시설인 부산 유엔기념공원은 추모 공간이자 공연·전시 등 문화 인프라와 접근성을 갖춘 부산의 ‘핫플’로 거듭날 예정이라고 한다.
1968년부터 ‘장한 용사’ ‘장한 배우자’ 등을 시상하는 부일보훈대상을 운영하고 있는 〈부산일보〉와 만난 박 장관은 “보훈이 현충일과 같은 특정 기념일에만 찾는 ‘일회성 보훈’이 아니라 ‘일상 속 보훈’ ‘문화로서의 보훈’으로 늘 우리 생활 속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수국처럼 때와 곳에 따라 저마다의 빛깔로 나라를 위해 활짝 꽃을 피운 청춘들을 차별하지 않고 국가가 기억하는 보훈이 요긴하게 다가오는 이즈음이다.
임성원 기자 forest@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