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년 시월 이순신이 부산을 공격했다, 역사가 바뀌었다.[부산피디아 EP.7 부산대첩]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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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0월 5일은 '부산시민의 날'이다. 1980년 손재식 시장 시절 제정됐는데, 이날이 되면 부산 곳곳에서 축제와 시민 참여 기념 행사가 열린다. 그러나 40년이 넘었지만 이날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부산 시민 대다수는 모른다. 힌트는 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과 부산이 무슨 관계가 있냐'고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명량해전, 한산도대첩, 그리고 노량해전 등 이순신의 '3대 해전' 못지않게 중요한 전투가 바로 부산 앞바다, 즉 지금의 부산항 일대에서 벌어졌다. 바로 임진년을 종결지은 마지막 해전 부산대첩이다. 10월 5일은 부산대첩의 승리를 자축하고 기억하는 날이다.


■ 반격의 시작

1592년 5월 부산은 왜적에게 철저히 짓밟힌다. 16만여 명의 대군단이 바다를 통해 부산으로 쳐들어왔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것이다. 부산진성을 지키다 죽음을 맞은 정발 장군을 비롯해, 동래부사 송상현, 다대포 첨사 윤흥신 그리고 많은 백성과 군인들이 왜적에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후 부산은 7년 동안 왜적의 본진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부산을 통해 무기, 식량 등 전쟁물자가 보급되고 왜적의 주요 병력이 주둔하는 군사시설 역할을 한다. 파죽지세로 밀고 간 왜적은 20일 만에 수도 한양을 함락하고 선조는 평양까지 도망친다.

반격은 바다에서 시작된다. 전라좌수군을 이끄는 이순신은 임진년에 총 4번 출정한다. 6월 옥포해전에서는 적선 26척을 침몰시키며 조선군 최초로 승리를 기록한다. 기세를 이어 7월 2차 출정. 사천·당포·당항포에서 연이어 승전보를 올린다. 그리고 8월 한산도 3차 출정. 거북선을 앞세운 학익진으로 적선 50여 척을 수장시키며 대승을 거두게 된다. 3번의 출정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둔 이순신. 왜적에게 이순신은 저승사자 그 자체였다. 적의 수장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군에게 해전 금지령까지 내린다. 이순신에게 남은 것은 적의 본진, 부산을 공략하는 일이다.


10월 5일은 부산시민의날이다. 이 날짜는 부산대첩 승전일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부산일보DB 10월 5일은 부산시민의날이다. 이 날짜는 부산대첩 승전일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부산일보DB

■ 부산을 공략하다

출정에 앞서 이순신은 한 달 동안 전라우수군·경상우수군과 함께 훈련에 매진한다. 조선 수군 연합함대의 본진인 여수에서 부산까지는 그때 당시 뱃길로 4일이 넘는 거리였다. 500여 척의 적선과 수만 명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던, 왜적의 침략 전진 기지를 공격하는 것은 이순신 장군에게도 위험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적의 본진을 소탕한다면, 전쟁의 판도를 뒤집을 기회였다.

10월 4일 장림포해전을 시작으로 이순신 장군의 4차 출정이 시작된다. 5일 화준구미(몰운대)해전, 다대포해전, 서평포(구평동)해전, 절영도해전, 초량목(부산세관 근처)해전 등을 통해 총 24척의 적선을 격파하며 본격적인 부산대첩이 시작된다. 조선 수군은 현재 영도다리가 놓인 지점을 통과해 부산항으로 진격했다.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앞세워 장사진(일렬)을 펼치며 부산 앞바다로 깊숙이 밀고 들어갔다. 바다에서 승산이 없었던 왜적들은 배를 버리고 해안선 진지에서 공격을 퍼부었다. 조선 수군은 거북선 2척과 판옥선 74척이 주요 병력이었다. 단순히 숫자만 놓고 비교하면 불리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반복된 패배로 왜적들은 사기가 땅끝까지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왜적들은 난공불락 거북선을 공격하다 뒤에서 오는 판옥선의 공격을 막지 못했고, 그러는 사이 거북선은 더 가까이 침투해 적진을 초토화했다. 치열한 전투는 해가 지고 나서야 끝이 났다. 100여 척의 왜적선을 부산 앞바다에 가라앉힌 조선 수군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하지만 희생도 있었다. 바로 이순신의 오른팔 정운이 부산대첩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 몰운대에는 그를 기리는 추모비도 세워져 있다.


몰운대에 있는 정운장군 추모비. 부산일보DB 몰운대에 있는 정운장군 추모비. 부산일보DB

■ 바다를 되찾은 전투

부산대첩은 그 규모와 치열함에 있어 '이순신의 3대 해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스스로에게 엄격했던 이순신 장군도 부산대첩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이순신 장군은 장계에 '장수들의 공로를 논한다면 부산싸움보다 더 큰 것은 없다. 하루 종일 공격해 적선 100척을 격파했다. 적들로 하여금 간담이 서늘해지고 두려워서 벌벌 떨게 했다. 힘써 싸운 공로는 지난번보다 훨씬 크다'고 보고했다.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역임하고, 이순신을 마음 속 스승으로 모시며 '이순신 알리기'에 매진하는 부산대첩기념사업회 김종대 명예이사장은 "이순신 장군 4번의 출정은 모두 중요하다"며 "옥포해전은 승리의 씨앗을 뿌렸고, 당항포해전은 잎을 피웠으며 한산해전이 꽃을 피웠다면, 부산대첩은 '제해권 장악'이라는 열매를 맺게 된 전투"라고 말했다. 부산대첩 이후 바다는 조선 수군 통제 하에 있게 된다. 바다를 되찾은 것이다. 또 해상 보급로를 틀어막아, 육군과 수군의 동시진격이라는 왜적들의 '수륙병진' 전략의 한 축을 무너뜨린 셈이다. 평양까지 진출했던 왜적은 경상지방으로 후퇴, 명나라와 강화협상을 이유로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기까지 장기간 대치 국면을 맞게 된다. 부산대첩은 임진년을 승리로 종결지으며 일종의 휴전 상태까지 끌어낸 것이다. 김 명예이사장은 "왜적에게 그들의 본진이 공격당했다는 것은 큰 충격이었다"며 "당시 부산에 주둔하던 일본 사령관 하시바 히데카츠가 부산포해전에서 패한 뒤 화병으로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했다.


자타공인 이순신 전문가인 김종대 명예이사장. 그는 부산대첩은 부산시민이라면 꼭 기억해야 할 역사라고 말한다. 부산일보DB 자타공인 이순신 전문가인 김종대 명예이사장. 그는 부산대첩은 부산시민이라면 꼭 기억해야 할 역사라고 말한다. 부산일보DB

■ 부산대첩을 기억하자

최근 부산항 북항재개발 지역 주요 도로의 명칭이 '이순신대로'로 정해졌다. 부산세관에서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을 잇는 길로 부산대첩의 승전지에 걸맞아 보인다. 더불어 부산의 랜드마크가 될 북항을 관통하는 도로 이름을 ‘이순신대로’로 지음으로써 잊힌 ‘부산시민의 날’의 의미를 살리는 효과도 크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북항 일대에 부산대첩기념관이나 부산대첩기념공원을 만드는 것은 어떨까. 부산대첩 승전로를 따라 관광코스를 만드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2030세계박람회(엑스포)가 북항에 유치된다면, 그야말로 전 세계에 부산과 부산대첩을 알릴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김 명예이사장은 "역사적으로 위대한, 보석 같은 우리의 과거를 후손들과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며 "부산대첩이 있어서 부산이 있고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430여 년 전 부산 북항 앞바다에는 나라를 구한 호국의 역사가 잠자고 있다. 부산대첩 승전일을 부산시민의 날로 지정한 것은 의미가 남다르다. '이순신 정신' 즉 왜적의 침입에 당당히 맞서 싸워, 패망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해낸 원동력을 '부산 시민의 정신'으로 이어받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김 명예이사장은 "애민, 정의, 선공후사 등 이순신 정신은 공동체가 건강해질 수 있는 비결을 담고 있다"며 "부산대첩은 부산 시민이라면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자랑스러운 역사"라고 힘줘 말했다. 지면으로 못다 한 ‘부산피디아 부산대첩’ 이야기는 〈부산일보〉 유튜브 채널(youtube.com/@TheBusanilbo)에서 만나 볼 수 있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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