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망국적인 사교육, 지역균형발전이 답
송지연 정치·사회 파트장
도입 30년 만에 암기식으로 변질된 수능
킬러 문항 단속만으로는 사교육 해결 안 돼
지역에 양질의 일자리와 명문대 육성이 해답
우리나라 첫 대학수학능력시험은 1993년에 실시됐다. 수학능력, 즉 ‘학문을 닦을 수 있는 능력’이라는 시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기존 학력고사의 암기식 교육의 한계를 극복하고 학생들의 논리·추론적 역량을 평가하겠다는 취지로 도입됐다.
수능이 시행된 지 올해로 30년이 됐다. 그동안 수능은 또 다른 형태의 암기 시험으로 바뀌었다. 아이들은 EBS 연계 문제를 비롯해 수능 유형을 달달 외워 ‘문제 푸는 기계’가 됐다. 어지간한 성인들도 풀기 어렵다는 ‘킬러 문항’은 그 때문에 탄생했다. 상향 평준화된 문제 풀이 능력의 변별력을 위해 오답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문제가 필요한 것이다.
최상위권과 상위권 아이들을 가르는 킬러 문항은, 이 문항이 아니어도 다수의 오답을 내는 중위권 아이들까지 힘들게 하고 있다. “저 학원에서 명문대 출신이 많이 나왔다”는 소문은 명문대 입학을 희망하는 다수의 욕망을 자극해 중위권 수요까지 흡수하며 사교육 시장을 키우고 있다.
대통령이 ‘수능에서 킬러 문항을 배제하라’는 지시를 내린 후 교육계 후폭풍이 거세다. 정부는 수능 출제위원과 사교육 시장의 결탁을 뿌리 뽑고, 킬러 문항을 관리해 사교육 시장의 과열을 막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이 정도 대응으로는 연간 26조 원에 달하는 거대한 사교육 시장을 잡기 어렵다. 공교육을 무력화하는 기형적인 사교육 문화는 근원적으로 치열한 입시 경쟁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역사상 정부가 ‘사교육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두 번이다. 1960년 5월 29일 경향신문 3면 기사를 보자. ‘망국적 과외수업의 철퇴’라는 제목의 기사는 명문 중학교 입학을 위해 국민학교 6학년을 학교에 남겨서 교사들이 매월 1만~2만 환씩 받고 개인 교습을 하는 행태를 비판하고 있다. 정부는 ‘광적인 과외 수업’을 근절하기 위해 학생들을 오후 3시 이후 학교에 남겨서 수업을 하지 않도록 하거나 학부모의 부담이 되는 시판 참고서 안에서 시험을 출제하지 않는 등의 조치를 단행했다. 이런 노력도 소용이 없었던지 결국 1969년 중학교 평준화 정책이 실시됐고 중학교 입시 경쟁은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이후에는 고입이 문제가 됐다. 고교평준화 정책이 도입된 해인 1974년 1월 26일 자 조선일보 사설을 보면 중학교 평준화 이후 사교육 열풍이 고입으로 옮겨 붙어 불가피하게 고교평준화가 시행되었다고 설명한다. ‘1년에 3백억 원 내외의 학교 정상교육비 외의 과외공부 비용의 막대한 부담, 이 부담을 강요하게 된 그 치열했던 이른바 일류교 지향과 입시지옥 현상, 그것이 가져온 고교 교육의 기형화와 타락 등등의 병폐를 바로 잡기 위해 고교 입시 제도도 개혁된 것이다.’
고교평준화 정책 이후 50년 가까이 팽창해온 대입 사교육 시장은 공교육 왜곡뿐만 아니라 심각한 사회 문제를 만들고 있다.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자녀의 학습 능력과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는 부의 세습화, 사교육에 과도한 지출을 한 나머지 노후를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는 노인 빈곤, 양육비 부담에 자녀를 아예 낳지 않는 저출생 문제 등이다.
사교육과의 전쟁사가 보여주듯 ‘평준화’는 유일하게 검증된 승리의 전술이다. 대학도 평준화 된다면 대입 사교육 시장은 급격히 줄어들 것이다. 수학능력시험은 일종의 자격고사로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을 받으면 집 근처 대학을 추첨해서 다니는 식이다.
우수한 인재 양성이 우려된다면 대학 교육 프로그램을 그에 맞게 운영하면 된다. 입학은 쉬워도 졸업은 어려운 형태로 운영되어야 국내 대학의 글로벌 경쟁력이 높아진다는 진단도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미 형성된 대학 서열화와 출신 대학에 따른 일자리 질 차이 해소가 필요하다. 정부는 지역의 우수한 대학에 전폭적 재정 지원을 하는 글로컬대학 제도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글로컬대학 전략이 획기적인 교육 제도 개선으로 이어지려면, 보다 강력한 지역균형발전 전략과 연계되어야 한다. 안정된 수입과 사회적 지위가 보장되는 의대에 최상위권 학생들이 몰리는 현상에서 보듯이, 앞으로 ‘양질의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느냐’에 따라 전공의 서열화가 가속화할 것이다. 지역마다 특화된 양질의 일자리는 지역별 명문대학 육성과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한때 미국 캘리포니아의 사례처럼 지역에 ‘서울대 10개’를 만들자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다. 정부와 기업의 대대적인 투자로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UC버클리)와 엘에이캠퍼스(UCLA), 캘리포니아공과대(칼텍) 등 세계적인 명문대를 탄생시킨 사례를 참고하자는 주장이다. 지역 소멸이 가시화하고 국가 성장동력이 정체된 절박한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고려해볼 만한 모델이다.
송지연 기자 sjy@busan.com